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500752
한자 李亨雨
영어공식명칭 Lee Hyeongu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전라북도 익산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박정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7년 1월 13일연표보기 - 이형우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5월 10일 - 이형우 대구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 언도
추모 시기/일시 2012년연표보기 - 이형우 대통령표창 수훈
출생지 대붕암리 - 전라북도 익산시 웅포면 대붕암리 지도보기
활동지 익산 - 전라북도 익산시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 강점기 전라북도 익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이형우(李亨雨)[1897~?]는 1897년 1월 13일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시 웅포면 대붕암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발발한 3·1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익산에서도 천도교와 기독교 등 종교인들을 중심으로 독립만세운동이 계획되었다. 당시 이형우용안면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고 함라와 웅포 등지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되었다.

[활동 사항]

1919년 3월 3일 당시 천도교 익산교구장 박영진(朴永鎭)과 이리교구장 이중열(李仲悅), 이유상(李有祥), 정대원(丁大元) 등 여러 천도교인들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이때 이형우용안면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3월 10일에는 함라면웅포면 책임자였던 민영순과 함께 웅포 등지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다가 후에 일본 경찰에게 검거되었다. 1919년 5월 10일에 대구복심법원(大邱覆審法院)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한편, 웅포면 제석교회 측에서는 이형우가 기독교인으로 활동하며 3·1운동에 관여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실제로 이형우가 익산의 천도교와 기독교계의 연결점이 있었던 박영진과 행동을 같이했던 점으로 보면, 천도교와 기독교 계열의 연락책 역할을 맡았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상훈과 추모]

2012년 대한민국 정부는 이형우의 공적을 기려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판결문」(대구복심법원, 1919. 5. 10)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3(고려서림,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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