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3004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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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江門洞遺蹟 |
영어음역 | Gangmun-dong Yujeok |
영어의미역 | Archeological Site in Gangmun-dong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강원도 강릉시 창해로 443[강문동 302번지] 일대 |
시대 | 선사/철기,고대/삼국 시대/신라 |
집필자 | 지현병 |
성격 | 주거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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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주소 | 강원도 강릉시 창해로 443[강문동 302번지] 일대 |
[정의]
강원도 강릉시 강문동에 있는 철기시대 및 신라시대의 주거지 유적.
[위치]
강문동 유적은 강릉시의 동북쪽에 위치하며, 행정구역상으로는 강릉시 창해로 443[강문동 302번지] 일대에 해당하고, 경·위도상으로는 동경 128°55′, 북위 37°48′에 해당된다. 이 지역은 여름철 휴양지로 유명한 경포도립공원 내에 위치하는데, 유적은 경포호수와 동해 바다 사이에 위치한 사구지대에 위치한다.
[발굴조사 경위]
강문동 유적은 그 동안 철기시대 토기편이 간간히 채집되어 보고되어 왔으나, 유적의 정확한 위치와 분포범위는 파악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지난 2002년 4월 강원도 강릉시 창해로 441[강문동 302-1번지]의 여관신축부지에서 파괴된 철기시대 주거지 2기가 이 일대에서 처음으로 조사되었으며, 이후 2002년 6월에는 북쪽으로 접해있는 강원도 강릉시 창해로 443[강문동 302번지]에서 철기시대 여(呂)자형 주거지와 신라시대 주거지가 조사되어 유적의 성격이 밝혀지게 되었다. 또한 2002년 10월에는 남쪽으로 약 250여m 떨어진 곳의 강원도 강릉시 해안로406번길 20[강문동 305-3번지]에도 용도미상의 습지유구가 조사되었는데, 1, 2차 조사와는 달리 토층의 퇴적양상으로 보아 이곳은 과거 물이 흘렀던 곳으로 추정되었다. 이후 2003년 3월과 2004년 1월에 각각 강원도 강릉시 창해로 439[강문동 302-2번지], 강원도 강릉시 창해로 429[강문동 304-2번지]의 여관신축부지에 대하여 발굴조사가 실시되어 철기시대 및 신라시대 주거지가 확인되었다.
[발굴결과]
강문동 유적은 총 5차례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조사된 유구는 주거지 16기, 원형유구 13기, 조개무지 2기, 습지유구 1기, 용도미상유구 1기 등 총 33기에 달한다.
주거지는 크게 철기시대 주거지와 신라시대 주거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철기시대 주거지는 Ⅰ-1호, Ⅰ-2호, Ⅱ-1호, Ⅴ-1호 주거지로 신라시대 주거지와 토층상으로 뚜렷이 구분되지는 않지만, 신라시대 주거지가 문화층 내에 형성되어 있다.
반면, 철기시대 주거지들은 문화층을 모두 걷어내자 윤곽선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Ⅱ-1호 주거지는 Ⅱ-17호 조개무지와 일부가 중첩되어 형성되어 있었는데, 조개무지 내에서는 신라시대 굽다리접시 및 토기편이 출토되어 시기적으로 일정한 차이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철기시대 주거지 중 완전한 주거지는 Ⅱ-1호 주거지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파괴되었거나 조사지역 밖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중 평면 형태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Ⅱ-1호, Ⅴ-1호 주거지로 모두 여(呂)자형의 형태를 띠고 있다.
이러한 여(呂)자형 주거지는 기존에 영동 지방에서 조사된 철기시대 주거지 중 철(凸)자형 주거지와 더불어 대표적인 것으로 강릉 안인리·동덕리의 유적, 양양 가평리 유적, 횡성 둔내·중금리 등에서 확인되었고, 그 외의 지역에서는 남한강의 충주댐 수몰지구, 하남 미사리, 몽촌토성, 포천 자작리 등, 한반도 중부지역에서만 확인되고 있는 실정이다.
기존에 연구된 바에 의하면 영동 지방 철기시대는 주거지의 평면 형태에 따라 크게 4시기로 구분할 수 있으며, 평면형태의 변화와 더불어 내부시설인 노지도 함께 변화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제Ⅰ기 장방(방)형 주거지 축조기, 제Ⅱ기 전기 철(凸)자형 주거지 축조기, 제Ⅲ기 여(呂)자형 주거지 축조기, 제Ⅳ기 후기 철(凸)자형 주거지 축조기로 구분할 수 있다. 따라서 이번 유적에서 조사된 주거지는 여(呂)자형 주거지로 내부에서는 공통적으로 점토띠식 노지가 설치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제Ⅲ기 여(呂)자형 주거지 축조기에 해당되며, 대체적으로 1세기~2세기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번 조사에서 신라시대 주거지는 총 12기가 조사되었는데, 대부분 파괴 및 조사지역 밖으로 이어지고 있다. 주거지의 평면 형태는 정형적으로 나타나고 있지 않으며, 대체적으로 방형 및 장방형의 형태를 띠는 것으로 보이지만 출입구는 남쪽으로 형성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Ⅱ-3호 주거지의 겨우는 철(凸)자형 주거지로 철기시대 철(凸)자형 주거지와는 달리 출입구가 동쪽으로 형성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형태]
비록 완전한 형태로 조사된 것은 아니지만 Ⅱ-4호, Ⅱ-5호 주거지에서는 부뚜막 시설로 추정되는 유구와 함께 연기는 주거지 밖으로 배출시킬 수 있게 설치한 점은 이전의 철기시대 주거지에서는 확인할 수 없었던 발전적인 구조이다. 특히 Ⅴ-2호 주거지에서는 한쪽 벽면을 따라 길게 배연시설을 설치하여 취사 및 난방을 좀더 용이하게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Ⅳ-1호 주거지에서 일본식의 하지키[土師器]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둥근바닥긴목항아리[원저장경호] 1점이 출토되었다. Ⅳ-1호 주거지는 비록 파괴가 심하여 전체적인 형태파악은 할 수 없었으나 바닥의 점토다짐 및 벽체처리에 있어서 철기시대 주거지의 전통을 강하게 간직하고 있으며, 출토유물 역시 모두 연질토기로 아직 영동 지방이 신라의 본격적인 영향을 받기 전인 3세기 후반에서 4세기 중반경의 유물로 추정된다. 이는 강릉 안인리, 동해 송정동의 철기시대 주거지에서 출토된 한식(漢式)토기, 소위 낙랑식토기와 함께 한반도의 서북한 및 일본과의 교역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유물로 판단된다.
[출토유물]
철기시대 주거지에서 출토된 유물은 토기류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토기류는 크게 민무늬토기와 두드림무늬토기로 나눌 수 있다. 그밖에 유물로는 목제 가락바퀴, 철제 낚시 등이 출토되었다. 민무늬토기의 양은 비교적 소량으로 완형 및 기형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Ⅰ-2호 주거지에서 완형으로 복원되는 민무늬토기 접시 1점과, 바닥이 결실된 민무늬토기 호 1점이 있고, Ⅱ-1호에서 4점, Ⅴ-1호에서 3점이 있다. 기형은 비교적 단순하여, 대부분의 아가리가 밖으로 벌어진 항아리[외반구연호]가 주류를 이루며, 완(盌)형토기 2점이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Ⅱ-1호 주거지를 제외한 나머지 주거지들은 파괴되었거나, 조사지역 밖으로 연결되고 있어 완전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라시대 주거지에서 출토된 토기 주로 연질토기의 호형, 심발형, 발형, 장란형 등의 기종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경질토기 계통의 굽다리접시나 긴목항아리의 출토유물은 거의 없거나 드물지만, Ⅱ-5호, Ⅴ-2호에서 출토된 굽다리접시 및 둥근바닥긴목항아리 등을 살펴보았을 때 대체적으로 5세기대의 특징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Ⅳ-1호 주거지에서는 모두 적갈색 연질토기만이 출토된 것이 특징이며, 이중 둥근바닥긴목항아리는 일본에서 주로 출토되고 있는 하지키[土師器]와 유사한 형태로 영동 지역이 본격적으로 신라의 영향을 받기 전인 예국(濊國)의 유물로 추정된다.
또한 주거지의 구조면에서는 대부분 파괴되어 정확한 형태를 파악할 수 없었지만, 함께 조사된 신라시대 주거지들에 비하여 비교적 크고, 바닥은 점토를 깔고 불다짐을 하였으며, 벽체쪽으로는 진흙벽의 흔적이 있는 등 철기시대 주거지의 특징을 강하게 계승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러한 둥근바닥긴목항아리는 철기시대 말기, 즉 3세기 후반에서 4세기 중반경의 과도기적 유물들로서 아직 영동 지방이 신라의 본격적인 영향을 받기 전 시기의 유물로 추정된다.
[의의와 평가]
강문동 유적 발굴조사에서 가장 큰 성과중의 하나가 바로 신라시대 주거지를 확인한 점이다. 그 동안 간혹 신라시대 저장유구로 추정되는 유구가 발굴된 적은 있지만 주거지 내에 노지를 갖추고 확실하게 인간이 거주한 흔적이 있는 유구는 아마 처음일 듯싶다. 또 하나의 중요한 성과는 Ⅳ-1호 주거지에서 일본식의 하지키[土師器]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둥근바닥긴목항아리 1점이 출토된 점이다.
강문동 유적은 철기시대의 여(呂)자형 주거지에서부터 신라시대의 주거지까지 함께 발굴됨으로써 그 동안 영동 지방에서 공백상태로 남아 있던 3~4세기의 고고학적 자료가 축적된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성과라 하겠다. 또한 기존에 많은 신라시대 분묘유적이 조사되었지만, 생활상을 직접 살필 수 있는 생활유적이 발굴된 것은 흔치 않은 계기로 삼국시대 문화상을 복원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