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3020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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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先史住居址 |
영어음역 | seonsa jugeoji |
영어의미역 | prehistoric dwelling sit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강원도 강릉시 |
시대 | 선사/선사 |
집필자 | 이성주 |
[정의]
인간이 살던 모든 형태의 살림 유적.
[개설]
인간활동의 대부분은 집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데 집이란 비, 바람, 맹수로부터 보호해 주며 인간생활의 근간이 되는 곳이다. 따라서 집터〔住居址〕란 인류가 지구상에 출현한 후 그들이 생활하며 남긴 구조물이나 유물을 통해서 당시의 생활상을 복원할 수 있는 종합적이고 복합적인 유적이다. 현재 우리 나라의 주거양식의 대표적인 기와집이 등장하는 시기는 고대국가가 형성되는 역사시대부터이다. 그 전에는 자연동굴, 천막집, 바위그늘집〔岩蔭住居〕, 움집〔竪穴住居〕, 고상주거(高床住居) 등의 집터가 남아 있다.
[구석기시대]
우리나라에서 구석기시대에 움막을 지은 흔적이라고 보고된 것이 공주 석장리, 제천 창내, 화순 대전유적 등에서 발견되지만 뚜렷한 구조물의 흔적은 찾기 어렵다. 동굴 주거유적은 상당히 많이 보고되어 있는데 평안남도와 충청북도 석회암지대에서 특히 많이 발견되었다. 강릉 지역에는 해안 단구면이 발달하여 구석기시대 고토양층이 잘 남아 있는 곳이 많은데 이곳에서는 구석기시대 사람의 점유로 나타난 석기유물이 자주 발견된다. 그러나 아직 야외주거지는 발견된 바 없다.
[신석기시대]
신석기시대로 접어들면 정착성은 매우 높아진 것 같지만 견고한 구조물로 된 가옥들이 모여 있는 정주취락은 시간이 좀 지나야 나타난다. 토기를 제작하던 신석기문화단계에 들어서도 우리나라에서는 농경이 바로 시작된 것은 아니었으며 채집에 의존한 생활을 영위했다. 초기에 해당되는 유적들은 바위그늘이나 정착성이 약한 주거가 오히려 일반적이었던 듯하다.
신석기시대 정착주거로서 가장 이른 시기에 해당되는 것은 지금부터 8,500년 전쯤 되는 강원도 고성 문암리유적과 양양 오산리유적과 같은 예가 있다. 바닷가 사구지대에 원형의 움을 파고 바닥에 진흙을 발라 단단히 굳힌 다음 한가운데 돌을 돌려 노지를 만들고 목재와 갈대를 이용하여 집을 지은 움집이다.
강릉 지역의 신석기시대 주거지 및 취락은 초당동유적에서 발견된다. 초당동유적의 신석기시대 주거지는 전형적인 빗살무늬토기 단계의 것으로 중서부지방의 빗살무늬토기 양식과 남해안 지역의 양식이 공존한다. 원형의 비교적 얕은 구덩이를 파고 주거지 한가운데에 원형 혹은 타원형으로 돌을 돌린 노지가 있는 집자리이다. 진흙을 굳혀 만든 주거지 바닥을 가지고 있지 않은 점이 이전 시기와 차이가 있다.
초당동 취락지에서는 원형의 집자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야외노지 4기, 할석유구 4기와 함께 집자리 4기가 발견되었다. 한강 유역의 암사동이나 미사리, 진주 상촌리 유적과 같은 신석기시대 취락은 기원전 4,000년을 전후한 시기인데 원형, 방형, 타원형의 움집이 모여 취락이 형성된다. 5-6동의 움집과 공동시설로 여겨지는 창고와 야외노지 등으로 구성된 취락인데 강릉 초당동 취락도 비슷한 양상이다.
[청동기시대]
우리나라에서 발달된 농경취락은 청동기시대가 되어야 나타난다. 청동기시대 전기의 주거지들은 대부분 규모가 큰 장방형이나 세장방형의 움집이 주류를 이룬다. 핵가족이기보다는 확대된 가족 구성원들에 의해 점유된 주거지라고 생각된다. 청동기시대 전기의 취락은 주거들이 그리 대규모로 밀집된 경우는 발견되지 않는다. 청동기시대 초기의 취락은 하안 대지에서 많이 발견되고 점차 구릉지에서도 많이 발견된다.
강릉 지역에서는 영동지방의 취락 중에는 가장 이른 시기의 취락이 확인되었는데 구릉지역에서 발굴된 교동·방내리·입암동 유적 등이 있다. 이와 같은 전기유적에서 하나의 구릉지를 점유한 취락들은 대형의 장방형주거지가 몇몇의 작은 방형 혹은 장방형의 주거지와 함께 능선을 따라 배치되는 특징을 보여준다. 이른 시기의 주거지는 보통 그리 깊지 않은 방형, 장방형의 움을 파고 벽에 판자를 대고 벽체를 올렸으며 주거지의 중앙으로 하나 혹은 두개의 노지를 두고 있다. 이른 시기의 노지는 방형으로 돌을 돌려 짠 이른바 위석식이고 무시설의 구덩이형이나 점토띠식도 있다.
청동기시대 중기부터는 우리나라 전역에서 집자리의 크기가 줄어들고 취락은 확대된다. 즉 주거의 형태가 핵가족에 의해 점유되었으리라고 여겨지는 원형이나 방형의 움집으로 축조되고 이들이 대규모 밀집되어 형성된 취락도 나타난다. 청동기시대 중기부터는 취락둘레에 커다란 환호나 창고, 토기 가마와 같은 방어, 생산시설 등이 복합적으로 구축되는데 이러한 변화는 후기에도 지속된다.
강릉 지역에는 청동기시대 중기의 취락은 잘 확인되지 않으나 후기의 취락으로는 방동리·송림리 유적이 있다. 그중 방동리유적은 여러 가닥의 능선에 걸쳐 형성된 비교적 대규모의 취락으로 상당히 많은 수의 방형, 장방형의 움집이 발견되었는데 집자리의 규모는 대부분 소형에 가깝다. 방동리유적에서는 이전 시기의 취락에서 발견되지 않았던 방어시설로서의 환호, 그리고 저장혈군과 토기가마 등이 함께 발견되었다.
[철기시대]
영동지방의 철기시대 문화 연구는 취락유적을 중심으로 연구되어 왔다. 강릉 지역은 특히 철기시대가 되면서 구릉상의 청동기시대 취락이 해안의 사구지대로 이동하여 입지한다. 이 지역 철기시대 집자리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대형의 呂자형 혹은 凸자형의 움집이다. 기본형은 장방형이며 움의 깊이가 깊고 넓으며 呂자, 凸자로 돌출한 부분은 일종의 문이 달린 출입시설이다. 주거지 둘레로 판자벽과 선반을 갖추고 있으며 주거지 중앙에 약간 치우친 곳에는 점토로 테두리를 하고 자갈을 깔아 만든 노지가 있다. 주거지의 평면형과 구조상으로 이전 시기의 청동기시대 후기 주거지와는 전혀 다르고 태백산맥을 넘어 한강유역과 동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퍼져 있는 두만강 유역과 연해주 지역의 철기시대 문화상과 상통한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강릉 안인리유적과 같이 여러 시기에 걸쳐 커다란 규모로 형성된 취락의 전모가 조사되면서 주로 주거지의 구조를 중심으로 영동지방 철기시대 문화의 기원과 변천을 논의해 왔다. 강릉에는 안인리 말고도 초당동과 강문동, 교항리, 동덕리 등의 사구지대에서 많은 수의 주거지가 발굴된 바 있다.
영동지방 주거지의 구조적 변천을 보면 가장 오래된 형식이 장방형 주거지이고 그 다음 단계가 凸자형주거지, 그리고 呂자형주거지로 변천하다가 다시 凸자형주거지가 나타난다고 한다. 이러한 주거지의 평면형의 변천이 시기적인 변화를 그대로 반영하는지는 아직 확실하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