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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당리 7·24사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303461
한자 草堂里七-二四事件
영어음역 Chodang-ri Chirisa Sageon
영어의미역 July 24 Incident in Chodang-ri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강원도 강릉시지도보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남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좌우익충돌사건
발생(시작)연도/일시 1946년 7월 24일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946년 7월 25일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강원도 강릉시 초당동

[정의]

1946년 7월 강릉시 초당동에서 발생한 좌우익 충돌 사건.

[역사적 배경]

몽양 여운형이 주문진 교향리에서 동생 여운홍과 함께 학교를 세워 학생을 가르치고 있던 중, 취영정 계원인 초당 최용집이 여운형을 초당으로 모셔와 초당영어학교를 세우게 되었다. 2년 동안[1908~1910] 그의 민족의식 앙양, 영어, 창가, 체력 단련 등의 가르침은 초당리 주민들의 의식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발단]

초당에 거주하고 있는 좌익들이 우익 인사들에게 고통을 준다는 소식에 건국청년회, 대한청년단, 서북청년단 등 우익 단체들이 그들을 구출해야 한다고 초당으로 들어감으로써 충돌이 일어났다.

[경과]

우익 단체들이 초당에 들어가자 초당리 주민들이 합세하여 충돌하였으므로 우익 진영은 후퇴하였다. 그날 밤 강릉 시내에서 쌍방 간에 투석전이 벌어져 2차 충돌이 있었다. 이때 석종문, 김만출, 이종남 등이 주축이 된 검은 셔츠를 입은 주문진 우익청년단[흑셔츠대]이 강릉으로 지원을 나와서 우익 청년들과 함께 대항하였다.

[결과]

초당리 주민들과 건국청년단의 권영기 등 몇몇 부상자가 생겼으며, 다음날 에드워드 군정관이 경찰과 함께 초당으로 파견되었다. 이때 미군이 온다는 소식에 초당리 주민들은 일치단결하여 폭동 진압대와 충돌하였다. ‘미군 죽여라’라는 구호까지 난무하면서 주민들이 모여들자 에드워드 군정관은 총을 발사하여 주민들을 해산시켰다.

[의의와 평가]

해방 직후 최사규, 최학선 등을 중심으로 독서회를 조직하여 좌익 정신을 주입시켰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우익에서 초당리 주민에 대해 상당한 선입관을 갖고 있었다. 또한 초당과 송정 지역은 소작이 많았기 때문에 지주에 대한 반발이 심하였던 것 같다.

초당리 7·24사건몽양 여운형의 영향이 컸다는 점, 미군정에서 초당리를 Left Village[좌경촌]라고 표현한 점, 한국전쟁 때 월북자들이 많은 지역이었다는 점 등으로 좌경시하는 경향이 있으나 미군이 공동으로 쌍방을 체포한 점이라든지, 극렬좌익분자가 없었다는 점 등에서 볼 때 민란 성격의 우발적 사건으로 파악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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