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5000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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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驛舍-歷史- |
영어공식명칭 | Sad history remains in the oldest history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라북도 익산시 춘포면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문신 |
[정의]
국가등록문화재 제210호로 지정된 전라북도 익산시 춘포역에 관한 이야기.
[개설]
춘포역(春蒲驛)은 일제강점기부터 줄곧 ‘대장역’으로 불리다가 1996년 ‘춘포역’으로 개칭되었다. 박공지붕의 목조 구조에 슬레이트 지붕을 올린 소규모 철도 역사(驛舍)이지만, 대한민국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이기도 하다. 이러한 문화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5년 11월 11일 익산 춘포역사는 근대문화유산으로서 국가등록문화재 제210호 ‘익산 구 춘포역사(益山舊春蒲驛舍)’로 지정되었다.
일제 강점기 대장촌에서 수확한 쌀을 군산항으로 실어 날랐던 춘포역은 광복 이후 익산과 전주로 통학하는 학생들의 발이 되어 주었다. 그러나 도로교통이 발달하고 자동차의 보급이 늘어나면서 춘포역의 여객 운송 기능은 급속하게 떨어졌다. 결정적으로 1999년 완주군 삼례읍에서 익산시로 향하는 국도27호선이 4차선으로 확장되면서 춘포역의 여객 운송 기능은 결정적인 타격을 받게 되었다.
결국 1993년 비둘기호 승차권 발매 중지, 2005년 역무원 무배치 간이역으로 운영되다가 2007년 6월 1일부로 여객 취급이 중단되었다. 그리고 2011년 5월 13일 전라선 복선전철화가 완료되면서 새로운 고가철로가 가설되었고, 철도역으로서의 기능을 잃은 춘포역은 폐역되어 역사를 제외한 모든 시설물들이 철거되었다. 1914년 11월 14일 오오바역[大場驛]으로 출발하여 춘포역으로 폐역될 때까지, 춘포역은 백 년 가까운 세월 동안 자리를 지키며 춘포 사람들의 삶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20세기 초입에서 만난 대장촌]
완주군 동상면에서 발원하여 급하게 밀려온 만경강 물줄기가 잠시 거친 숨을 고르듯 유속을 늦추는 곳, 북쪽에서는 익산천이 합류하고 남쪽에서는 마산천이 어우러지며 한 번 크게 몸을 뒤틀어대는 곳에 춘포가 있다. 지금은 춘포로 알려져 있지만, 춘포는 봄나루를 뜻하는 ‘봄개’에서 비롯한 지명이다. ‘봄개’의 소릿값이 변해 ‘봉개’로 되었다고 전하며, 그 영향으로 춘포에는 봉가뜰[춘포평], 봉개산[춘포산] 등 관련 지명이 여전히 남아 있다. 봉개산은 춘포에서 가장 높은 산이며 봉개산 발치를 따라 익산천이 흐른다. 지금은 수량이 줄어 상상하기 힘들지만, 옛날에는 이곳에도 배가 닿았다.
오랫동안 만경강과 익산천, 마산천 등 물길을 통해 사람과 물자가 흘러들었던 춘포에 근대의 첨병이 들어선 것은 1914년이었다. 1914년 3월 이리-전주 간 철도부설 허가를 얻은 전북경편철도회사는 24.9㎞의 협궤(狹軌) 단선철도를 부설하고 1914년 11월 14일 춘포역 영업을 시작하였다. 당시의 역 이름은 ‘오오바역’이었고, 광복 이후 우리 식으로 한자음을 읽은 ‘대장역’으로 불렸다. 일제 강점기에 춘포면 소재지가 대장촌으로 불린 것은 이곳 들이 넓었기 때문이다. 윤춘호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 지주들이 이 마을에서 대규모 농장을 경영하였다고 해서 ‘대장촌’, 일본말로 ‘오오바무라(おおばむら)’라고 불렸다는 것이 대장촌에 얽힌 통설이라고 하였다. 또한 춘포 일대를 ‘대장촌’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은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기 이전인 19세기 중반이며 각종 역사 자료에 ‘대장촌(大壯村, 大長村)’이라는 이름으로 표기되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한자의 표기를 ‘대장촌(大場村)’으로 바꾸었다고 정리한다.
대장촌 지명의 유래가 어찌 되었든 이곳 들이 넓었다는 사실만은 틀림이 없다. 북쪽으로 야트막하게 솟은 해발 46m의 춘포산을 제외하면 시선을 가로막는 것이 없다. 그러다 보니 만경강 제방마저도 웅장하게 보인다. 이곳 사람들이 ‘대보둑’으로 부르는 제방은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졌으며, 만경강을 품안에 안고 전주, 완주, 김제, 익산으로 총 길이 60㎞ 넘게 이어진다. 만경강 제방은 춘포를 전근대로부터 근대로 이끌었던 최초의 상징이면서 쌀 수탈의 증인이다. 자연 지형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지던 만경강은 일본인들이 들어오면서 직강(直江) 사업을 벌였는데, 만경강이 곧은 강이 되기 전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는 『남유수록(南遊隨錄)』에 담긴 이복영의 표현을 보면 알 수 있다.
“산등성이에 올라가 보니 평탄하고 넓은 들판 가운데에 허리띠처럼 좁은 강물이 돌아가고 있었다.”
이복영은 부여 선비로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와중에 대장촌을 방문하였다. 당시 이복영이 본 만경강 일대는 지금도 그렇지만 예로부터 노화십리(蘆花十里)라고 불렸다. 만경강 연안에 만개한 갈대꽃은 장관이었다. 대장촌의 만경강은 갈대꽃을 거느린 채 강폭이 허리띠처럼 좁고 마치 뱀이 구불거리는 것처럼 흘러갔다. 사행하천(蛇行河川)이었던 만경강을 직강화한 것은 일본인들이었다.
[춘포의 수로와 철로]
대장촌에 본격적으로 일본인이 들어온 것은 1904년이었다. 전 일본 총리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의 할아버지로 알려진 호소카와 모리다치[細川護立]가 거금 15만 원을 투자하여 춘포에 터를 닦았다. 이후 일명 호소카와농장이 만들어지게 되는데, 춘포 일대의 수확량을 증산하기 위하여 일본인들은 수로 시설을 개선하는 공사를 벌였다. 이를 위해 1922년 완주군 고산면 대아리에 댐을 완성하였고, 1923년 농토 확장과 농지개량을 위하여 대간선수로 확장 공사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완주군 삼례읍에 있던 독주항보(犢走項洑)를 확장하고 옥구저수지를 완공하였다.
1924년부터 1939년까지는 만경강 직강화 공사를 벌여 대장촌 일대, 삼포 등의 개흙밭, 오산과 옥구 등의 땅을 개간하고 개척하여 농경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생산된 쌀은 춘포역을 통하여 군산항에서 일본으로 반출되었다. 그런데 바로 이 점이 역사의 아이러니처럼 읽힌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삼례에 동학농민군 총지휘부인 대도소(大都所)를 설치한 전봉준은 군산에 있던 군량미를 즉시 대장촌으로 옮기라고 명령하는데, 이런 상황을 당시 일본공사관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삼례 대도소에서 군산진에 통문을 보내 유박미(留泊米) 1,000석을 즉시 전주 대장촌으로 운반하라고 하였다.”
당시 대장촌 일대 호남평야에서 산출된 쌀은 군산진으로 수합되어 배편으로 한양으로 운송되었는데, 전봉준이 군산진에 선적되어 있던 쌀 1,000석을 대장촌으로 옮기라고 명령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만조기에 서해 바닷물이 춘포까지 밀려왔고, 춘포는 대장촌에서 생산된 쌀을 실어 내던 큰 포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춘포는 수로를 통하여, 그리고 철로를 통하여 쌀이 들고나는 거점이었던 셈이다.
군산진으로 쌀을 실어 내던 춘포는 일제 강점기가 되면서 포구에서 역으로 변모하였다. 배가 닿던 포구에 근대를 상징하는 철도역이 생기면서 춘포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물길을 따라 왕래하던 사람과 물자들이 이제는 철로를 따라 흘러들고 흘러 나갔다.
1914년 11월, 익산시 춘포면 춘포1길 17-1[덕실리 481-3]에 춘포역이 세워진 후 한 세기가 지나는 동안, 춘포역은 수탈의 역사와 조국 근대화의 명실상부한 증인이 되었다. 애초에 전라선은 이리역을 기점으로 동이리역, 춘포역, 삼례역, 동산역, 송천역, 전주역까지 건설되었다. 이러한 전라선의 부설은 호남평야의 쌀을 수탈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제는 호남평야의 쌀을 수송할 목적으로 호남선을 부설하였는데 1912년 3월에 이리-군산 간 33㎞, 1912년 10월에 이리-김제 간 17.8㎞를, 1912년 12월에 김제-정읍 간 26㎞를 개통하였다. 익산을 기점으로 호남선이 김제와 정읍 등 남쪽 평야지대를 훑어간다면, 전라선은 대장촌과 삼례 등 동쪽 평야지대를 가로지른다. 조선총독부는 1927년 10월 익산과 전주 사이를 잇는 전라선을 사들여 ‘경전북부선’으로 이름을 바꾼 후 광궤(廣軌)로 개축하였다. 1929년 9월에는 전주역과 이리역을 증축하여 본격적으로 철도 영업을 시작하였다. 이때 이름 붙여진 경전북부선은 1955년 6월 다시 ‘전라선’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호소카와 농장과 쌀 수탈의 거점 춘포역]
춘포역은 일제가 쌀을 수탈해 가기 위하여 부설한 전라선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대장촌’이라는 명칭에서 연상할 수 있듯, 춘포 일대는 들이 넓었다. 이 때문에 일본인들이 일찍부터 이곳에 터를 잡고 대규모 농장을 운영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이 호소카와농장이다. 호소카와는 대장촌 일대에 기반을 잡고 적극적으로 구마모토 출신 농민들을 이주시켰다. 이들이 대거 이주하면서 대장촌은 ‘비후촌(肥後村)’으로 불리기도 하였는데, 비후는 현재 일본의 구마모토현에 대항하는 옛 히고국[肥後國]을 뜻하는 일본말이다. 그렇게 본다면, 당시 대장촌은 일본의 식민지이면서 구마모토의 식민지가 되는 이중적인 곳이었다. 호소카와농장의 일꾼들은 모두 이들 구마모토 출신이었는데, 당시 춘포 인구의 3분의 2가 넘는 1,000여 명이 호소카와농장에서 소작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호소카와 이전에 대장촌의 지주는 민영익(閔泳翊)이었다.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친정 조카인 민영익은 20대 초반에 당대 최고의 권력을 누렸는데, 부패한 정치권력을 이용하여 연고도 없었던 대장촌 일대의 최대 지주가 되었다. 춘포 일대 들에 물을 공급할 수 있는 독주항보도 민영익의 소유였다. 독주항보에서 나오는 물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농지가 1,300정보[약 390만 평, 1289만 2562㎡]였다. 1906년 민영익은 독주항보를 6명의 대장촌 지주들에게 1만 1000원[현재 금액으로 약 10억 원]을 받고 팔았는데, 이를 인수한 호소카와농장은 1910년 전라수리조합을 세워 농장의 관리 책임자였던 구로다를 초대 수리조합장으로 임명하였다.
춘포를 지나가는 만경강은 전라북도 서북부 평야지대를 관통하며 농사에 필요한 물을 공급해 주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상습적인 홍수의 근원이 되기도 하였다. 실제로 1920년과 1921년에 대홍수가 발생하여 춘포면 일대 농경지는 물론이고 많은 가옥들이 침수당하기도 하였다. 춘포에 홍수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곳 강폭이 하류에 비해 좁은 데다 만조 시 바닷물까지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일제는 자유곡류(自由曲流)천인 만경강의 범람을 막기 위해 제방을 쌓고, 꿈틀거리며 흘러가는 강물을 직강으로 바꾸었다. 그 결과 원래 강줄기의 흐름이 끊겨 춘포 근방으로 여러 개의 호수가 옛 강의 흔적으로 남아 있다. 만경강을 직강화하고 둑을 높이는 사업에 대규모 흙이 필요해지자 일제는 이곳에 선로를 깔고 흙 운반용 기관차를 투입하기도 하였다. 이때 직강화한 만경강 제방 아래 신촌, 중촌 마을이 들어섰고, 춘포역이 들어서면서 역전 마을 등이 형성되었다. 이렇게 대장촌과 춘포는 일제의 계획대로 쌀 수탈의 전진기지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지금은 폐역이 되었지만, 춘포역에서 만경강 제방까지 이어진 길은 화물차 두 대가 너끈히 교차할 만큼 도로 폭이 넓다. 중요한 것은 이 길이 해방 이후가 아니라 100여 년 전 만경강 개수공사 당시에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춘포역에서 대장촌 들판을 향하여 직선도로가 넓게 난 것은 대장촌 들에서 수확한 엄청난 양의 쌀을 춘포역에 실어 나르기 위해서였다.
[폐역, 그러나 기억되어야 할 새로운 시도들]
춘포역은 이제 더는 기차가 정차하지 않지만, 여전히 사람들 사이에 마음의 철로를 연결하고 있다. 2013년 11월 12일 익산문화재단은 최중호 씨를 명예역장으로 위촉하여 춘포역을 살려냈다. 최중호 명예역장은 1965년 역무시험에 합격하여 옛 이리역과 동이리역, 군산역, 김제역을 거쳐 익산역 역무과장까지 역무에 봉직한 후 1998년 명예 퇴직하였다. 최중호 명예역장이 기억하는 춘포는 독특하다.
“춘포는 옛날에 딸촌이라고도 불렀죠. 쌍방울 전신인 형제상회에 다니는 어린 여공들이 방값이 싼 춘포역 근방에 자취를 했는데, 통근열차 시간이 되면 떼를 지어 나와 사람들이 딸 많은 동네인 줄로 알고 그렇게 부른 거죠.”
최중호 명예역장의 말처럼 춘포역은 폐역 이후에 다른 이유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폐역이 되면서 여객 운송과 화물 수송 업무를 잃었지만, 사람들에게 새로운 문화예술 공간으로 태어난 것이다. 이렇게 춘포역은 백 년이라는 시간을 축적해 온 근대 문화유산이자, 춘포역을 통해 새로운 세상으로 떠나갔던 사람들과 춘포역으로 귀향한 사람들에게 당시 시절을 떠올리게 해 주는 추억의 장소가 되었다.
춘포역이 문화예술의 현장이 된 것은 춘포역의 운명인지도 모른다. 1934년 12월 25일자 『동아일보』에는 공연 예고 기사 하나가 짧게 소개되어 있다. “아름다운 목소리로 이름이 높은 테너 조화석 씨가 춘포공립보통학교 동창회 초청으로 다음 달 5일 독창회를 연다는 것.” 조화석의 독창회가 열리는 춘포공립보통학교는 1923년 익산군 춘포면 대장촌리에 세워진 학교였다. 전교생이라고 해 봐야 200명이 안 될 만큼 작은 학교였지만, 서양음악가 조화석을 배출하였다. 이를 통해 춘포 사람들이 일찍이 서양 음악을 접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930년대와 1940년대에 걸쳐 당대 최고 인기를 누렸던 명창 임방울도 춘포에 불려와 며칠씩 머무르기도 하였다. 이런 면에서 보면 춘포는 문화적 뿌리가 깊은 곳임에 틀림없다.
춘포에는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춘포역사뿐만 아니라 춘포의 백 년 세월을 함께한 건물들이 있다. 호소카와농장의 일본인 관리자 에토가 1940년경 농장 안에 지은 2층의 일본식 가옥과 대장정미소가 춘포역 가까운 곳에서 옛날을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일명 ‘대보둑’으로 불리는 만경강 제방이 있다. 만경강 제방은 강 양측이 각각 30㎞이고 총 길이 60㎞인데, 그 가운데 대보둑은 높이 6~7m에 달하는 대규모 인공 구조물이며, 둑 위로 자동차들이 교행하면서 다닌다. 봄이면 둑 위로 벚꽃이 피고, 가을이면 둑 아래 갈대가 흐드러지게 자란다. 그 시간의 갈피마다 사람들이 들어오고 나간다. 춘포역의 시간은 그렇게 여전히 흘러간다.
춘포역에서 세계적인 문호 톨스토이가 마지막 숨을 거둔 곳이 오르세역이었음을 떠올린다. 오르세역이 1986년 세계적인 오르세미술관으로 변신한 것도 기억한다. 춘포역은 어떤 역으로 기억되어야 할까? 100년 전 춘포 사람들이 누렸던 것처럼, 테너 가수와 최고 명창의 공연은 어떨까? 춘포 사람들이 저마다 품고 있는 춘포의 미래와 춘포역의 표정이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