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500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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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萬歲-文鏞祺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라북도 익산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최명표 |
[정의]
일제 강점기 전라북도 익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1919년 4월 4일. 이리장이 열리는 날이었다. 이날 장터에는 미리 약속된 300여 명의 군중이 모였다. 주동자는 군산 영명학교의 교사 문용기(文鏞祺)[1878~1919]였다. 영명학교가 있던 군산에서 고향인 익산으로 건너온 문용기는 기독교 계열 인사들과 몰래 만났고 3월 26일의 이리 만세 시위에 이어 4월 4일에 다시 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계획을 수립하였다.
4월 4일 만세 시위에 참여한 군중들은 문용기의 지휘에 따라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가지고 대열을 지어 시가를 행진하였다. 순식간에 군중이 1,000여 명으로 늘어나고 기세도 오르자 일본 헌병대가 출동하여 이를 제지하려 하였으나, 시위 군중은 더욱 큰 소리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일제는 수백 명의 소방대원과 오하시[大橋] 농장의 일본인 농장원을 동원하여 칼과 곤봉, 갈퀴 등을 휘둘렀고, 무차별 진압을 강행하여 사상자가 속출하였다.
이때 문용기는 의연히 오른손에 태극기를 들고 대열의 선두로 나아갔다. 일본 헌병이 칼을 휘둘러 오른팔을 내리치자 문용기는 왼손으로 태극기를 주워 들고 독립 만세를 외쳤고, 일본 헌병은 왼팔마저 잘라 버렸다. 두 팔을 모두 잃은 문용기는 굴하지 않고 뛰어가며 계속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다가 격분한 일본 헌병의 칼에 온몸을 난자당하여 사망하였다.
[만세 운동의 시작과 문용기의 탄생]
1919년 3월 1일 발발한 독립 만세 운동은 서울을 시작으로 금세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일제는 강점 후에 처음으로 전개되는 만세 행렬에 당황하여 무조건적 강제 진압으로 맞섰다. 처음에는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민족대표들만 구속하면 진정될 줄 알았으나, 일제의 기대와는 달리 천도교를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과 학생들이 앞장서서 전국 방방곡곡에서 만세 시위가 잠시도 쉬지 않고 일어났다. 특히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날을 기점으로 만세 시위가 벌어져 일본 경찰은 진압하느라 애를 먹었다. 그들은 조속한 시일 내에 소요 사태를 진정시키고자 강경책으로 일관하였고, 그로 인해 식민지에는 민중들의 희생이 날로 늘어났다. 하지만 민중들은 만세운동을 기화로 나라를 잃어버린 피식민지민의 처지를 정확히 인식하게 되었고, 급기야 앞으로의 항일 민족해방운동 전선을 구축하는 발판으로 이용하였다.
전라북도의 독립 만세 운동은 군산에서 시작되어 도내의 이곳저곳으로 퍼져 갔다. 군산은 일찍부터 개항한 항구 도시답게 외국인의 선교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에 힘입어 군산 지역에는 여느 지역보다 개명한 무리가 많았고, 개신교의 영향으로 신교육도 활성화되어 곳곳에서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선교사들은 구암교회를 중심으로 전도에 목적을 두고 영명학교 등을 건립하여 학생들을 불러 모았다. 학생들 중에서 김제 백구면 출신의 김병수(金炳洙)[1898~1951]가 대표적이다. 김병수는 영명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다니고 있던 1919년 2월 26일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 사무장으로 근무하던 이갑성(李甲成)[1886~1981]으로부터 「독립선언서」 200여 장을 건네받으며 군산 지역의 시위 성사를 부탁받았다.
김병수는 군산에 내려오자마자 영명학교 은사이자 구암교회 장로인 박연세(朴淵世)[1883~1944]의 집에서 영명학교 교사 이두열(李斗烈)[1888~1954]·김수영(金洙榮)[1883~1950)·고석주(高錫柱)[1864~1937)·김윤실(金允實)[1886~1963] 등을 만나 서울의 상황을 알리고 3월 5일에 만세 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정하였다. 이 내용은 ‘인돈(印敦)’이라는 한국 이름으로 군산에서 선교 활동을 펼치고 있던 윌리엄 린튼(William A. Linton)[1891~1960]에게도 즉시 전해졌다.
1919년 3월 5일 만세 시위 대열에는 기독교 계열의 영명학교와 멜본딘여학교 학생이 주를 이루고 구암교회 교인들과 시민 등 500여 명이 참가하였다. 그 후로 군산에서는 무려 28회에 걸쳐 3만여 명의 군중이 시위를 이어 갔다. 한강 이남에서 최초로 벌어진 만세 시위에 놀란 일제의 강경 진압으로 인해서 밝혀진 숫자만 해도 사망자 53명, 실종자 72명, 부상자 195명에 이를 만큼 군산에서 벌어진 만세 운동의 여파는 컸다. 이러한 군산의 만세 운동은 소문을 타고 인근의 익산으로도 전해졌다.
[익산 만세 운동의 주축이 된 기독교 세력]
군산과 가까운 익산시 오산면 남전리에는 장로교 계통의 남전교회가 있다. 이 동리 사람들은 군산과 김제에 있는 교회를 다니던 중, 한국 이름으로 ‘전위렴(全緯廉)’이라 불리며 활약하던 선교사 전킨(William M. Junkin)[1865~1952]의 인도로 1900년 봄 이윤국의 집에 모여 마을에 교회를 설립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전킨은 일찍부터 군산에 구암교회를 세워 전도에 힘쓰고 있었다. 남전리의 교인들은 이듬해 어렵게 5칸의 초가에 예배당을 마련하고, 1921년에는 돈독한 신앙심에 입각하여 기존의 예배당을 증축했다. 또 이민들은 아이들의 신앙심 함양과 교육을 도모할 요량으로 도남학교를 세웠다. 아이들은 도남학교 교사로 있던 문용기를 따라 1919년 4월 4일 이리 장터에서 있었던 만세시위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배우고 익힌 바를 몸소 실천했다.
이처럼 기독교의 분위기가 자욱한 오산면 관음마을에서 문용기(文鏞祺)[1878~1919]가 태어났다. 그는 어릴 적에 어머니가 병에 걸려 위중하자 천지신명에게 기도를 드리고, 손가락을 절단하여 피를 바치고 변을 먹는 등, 갖은 노력을 다하여 병을 낫게 할 정도로 효심이 지극한 소년이었다. 가정이 어려운 형편인 줄 익히 알고 있던 문용기는 주경야독으로 한문을 공부하여 근처의 서당에 초빙되어 가르칠 정도로 탄탄한 실력을 갖추었다. 한문에 소양을 지닌 문용기의 명성이 근동에 알려진 덕분에, 24세의 문용기는 군산의 영명학교 한문교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문용기는 교사의 신분으로 학생이 되어 보통과정에 다니면서 신학문을 익히느라 분주하게 삶을 영위하였다. 30세에는 전남 목포에 세워진 왓킨스학교로 유학을 떠나서 영어를 배우는 학생이자 한문교사로 살았다. 배움 앞에서 나이와 신분을 가리지 않는 실용정신에 힘입어 문용기의 영어 실력은 일취월장하였다.
마침 문용기는 연설차 식민지 전역을 순회하던 중에 목포에 들른 이승만과 조우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는 방안에 대하여 밤새도록 토론하면서 의기를 투합하였다. 더하여 양인은 목포에서 연단에 동시에 서기도 하였다. 문용기의 연설 능력은 탁월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거니와, 장차 이리에서 주도할 만세 시위의 밑바탕이 되었다. 당시 현장에서는 이리장을 보러 왔다가 문용기의 연설에 감화되어 즉시 참가한 이들이 수백 명이었다고 하니, 가히 청중을 압도하는 언변을 짐작할 만하다. 1911년 학교를 마친 문용기는 함경도 갑산의 금광에서 미국인 통역사로 8년을 근무하면서 이재에 수완을 보여 상당한 가산을 축적하게 되었다. 그 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제공하던 중, 1919년 3월을 맞아 독립만세를 부르짖는 운동이 식민지의 전역에서 크게 벌어지자 급거 행장을 차려 고향으로 돌아왔다.
[오른손의 태극기, 왼손에도 태극기]
익산에 도착한 문용기는 이웃한 군산에서 벌어진 만세 시위의 전말을 듣고 서둘러 믿을 만한 동지들을 규합하였다. 춘포면 출신의 박도현(朴道玄)[1865~1919], 남전리 출신의 장경춘(張京春)[1887~1919], 북일면 태생의 서정만(徐廷萬)[1889~1919], 논산 출신의 이충규(李忠圭)[1891~1919] 등 기독교 인사들과 몰래 만나 3월 26일부터 전개되던 이리 만세 시위를 장날인 4월 4일에 다시 일으키기로 하였다. 또한 예전부터 안면이 있던 충청북도 괴산 출신의 김제 만경공립보통학교 교사 임창무(林昌茂)[1893~1944]와 긴밀히 연락을 주고받으며 같은 날 이리와 만경에서 동시에 만세 시위를 전개하기로 밀약하였다. 임창무는 4월 4일 정오가 되자 3학년, 4학년 100여 명의 학생들과 함께 만경 장터에서 독립만세를 부름으로써 친구 문용기와의 약속을 지키는 한편으로 만경 지역의 항일 운동에 불을 지쳤다.
문용기는 이리 장터에 300여 명의 군중이 모이자 준비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며 시위를 시작하였다. 그때 서울 중동학교에 재학 중이던 김종현(金宗鉉)·김철환(金鐵煥)·이시웅(李時雄), 오산면 출신의 박영문(朴泳文)[1904~1919] 등이 합세하며 시위 군중이 순식간에 1,000여 명으로 불어나자 일본 경찰은 제지에 나섰다. 일제는 장터의 징후가 수상하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경찰과 헌병뿐만 아니라 소방대원과 대지주인 오하시[大橋] 농장의 일본인 농장원 수백 명을 동원하여 군중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시위대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오히려 불어나자 일제는 동원부대와 함께 총칼과 곤봉, 갈퀴 등을 휘두르며 무력 진압에 나섰고, 시위 군중이 대열을 흩트리지 않고 시위를 계속하며 저항하자 무차별 사격을 가하여 사상자가 속출하였다.
시위 군중이 동요하자 문용기는 오른손에 태극기를 들고 시위 대열의 맨 앞으로 나아가며 시위대를 독려하였다. 문용기의 형형한 눈빛과 의연한 기개에 놀란 일본 헌병이 칼을 휘둘러 내리치자 오른팔이 잘려 태극기와 함께 땅에 떨어졌다. 문용기는 쓰러지지 않고 다시 왼손으로 태극기를 주워 들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전진하였다. 일경이 왼팔마저 베어 버리자 문용기는 두 팔을 잃은 몸을 일으켜 뛰어가며 계속 독립 만세를 외쳤고, 이에 격분한 일본 헌병이 문용기를 쫓아가서 사정없이 난자하였다. 문용기가 포악한 일본 헌병의 칼에 죽임을 당하자 박도현·장경춘·서정만·이충규 등도 의연히 일본 헌병에 맞서 시위를 이끌다 문용기를 따라 순국하였다. 이리에서 만세 운동이 일어났던 당일, 일본 헌병에 체포되어 끌려간 인원만 공식적으로 39명에 달할 정도로 시위는 강렬하게 전개되었다. 문용기의 몸을 던진 항일이야말로 일제의 교화 정책에 순치되어 가던 이리 사람들의 독립정신을 깨우친 일대 사건이었다.
문용기가 일본 헌병의 칼에 베여 짧은 생을 비극적으로 마치자, 문용기의 아내는 야음을 틈타 사람들과 시신을 수습한 뒤 오산면 상신리 공동묘지에 유택을 마련하여 남편의 원혼을 달랬다. 그리고 문용기의 피 묻은 옷을 항아리에 담아 땅속에 묻어 보관하다가 광복이 되자 양자로 입양한 조카에게 건넸다. 기미년에 이리에서 벌어졌던 만세 운동의 경과를 생생히 증언하는 문용기의 혈의는 천안 독립기념관에 소중히 보관되어 후손들에게 선열의 애국심을 교훈하면서 전시되고 있다.
[여전히 울려퍼지는 만세의 함성]
이승만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되고 난 후에 문용기를 찾았다가 순국한 사실을 알고 애통한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고 한다. 이승만은 친히 대통령의 자격으로 비문을 내려 문용기의 공적을 안팎에 현양하도록 지시하였고, 1949년 4·4독립만세운동 기념비를 구시장 화교학교 앞에 세웠다. 그 뒤에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문용기의 공적을 기려 1968년 대통령표창을, 1977년 건국포장을,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문용기의 유해는 1990년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외적으로부터 독립된 조국의 하늘 아래서 영면을 취하고 있다.
문용기 의사의 순국은 나라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준다. 위정자들의 오판과 무능으로 야기된 국망의 폐해를 온몸으로 받아야 하는 민중들이 자신이 나라의 주인이기에 나라를 되찾겠노라고 분연히 일어났던 기미독립만세운동. 그때 문용기는 이북에서의 안정적 일터를 망설임 없이 내던지고 낙향하여 빼어난 연설로 장터에 나온 사람들을 계몽하여 만세 대열에 합류시켰고, 강토를 강점한 외세를 축출하고 독립을 되찾을 수 있는 한민족의 저력을 내외에 과시하였다. 문용기의 헌신적인 주도로 펼쳐진 이리의 만세 운동은 이리 시민들에게 대대로 기억되어야 하고, 선조들의 항일정신은 올곧은 자주정신으로 승화되어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수호하는 의지로 실천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