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500370
한자 統一新羅
영어공식명칭 Unified Silla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북도 익산시
시대 고대/남북국시대/통일신라
집필자 권익산

[정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부터 고려 건국 이전까지 전라북도 익산 지역의 역사.

[개설]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자 다양한 백제부흥운동이 벌어졌다. 신라는 익산 지역의 백제부흥운동을 막기 위하여 670년 안승을 금마저로 옮겨 보덕국을 세우게 하였다. 백제부흥운동이 진압되고 나당전쟁도 마무리되자 보덕국마저 684년 해체되고 익산 지역은 점차 신라 사회에 편입되어 갔다. 익산 지역은 미륵사가 세워지고, 백제 왕궁이 조성되는 등 백제 말기에 정치적·문화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지만 통일신라가 9주 5소경으로 지방을 재편하는 과정에서 전주(全州)가 중심지로 부상하면서 익산 지역의 중요성이 약화되어 갔다.

[통일신라 시대 연혁]

익산 지역은 신라 9주의 하나인 전주에 속하였다. 신라 경덕왕 대의 대대적인 행정 개편 과정에서 금마군(金馬郡), 옥야현(沃野縣), 야산현(野山縣), 함열현(咸悅縣), 여량현(礪良縣)이 설치되었다. 금마군은 지금의 금마면 지역으로 백제 때의 금마저(金馬渚)이었으며, 영현(領縣)으로 옥야현(沃野縣), 야산현(野山縣), 우주현(紆州縣)을 두었다. 옥야현은 본래 백제의 소력지현(所力只縣)으로 지금의 익산시 지역이다. 야산현은 본래 백제의 알야산현(閼也山縣)으로 지금의 낭산면 지역이다. 함열현은 임피군(臨陂郡)에 속한 현으로 본래 백제의 감물아현(甘勿阿縣)이었으며, 지금의 함라면 지역이다. 여량현은 덕은군(德恩郡)[지금의 논산]에 속하여 있었는데 본래 백제의 지량초현(只良肖縣)[지금의 여산면 지역]이었다.

[통일신라 시기 익산 지역의 사찰]

백제 무왕 대에 창건된 미륵사는 통일신라 시기에도 대규모 사찰로 운영되었다. 익산 미륵사지에서 통일신라의 다양한 수막새 기와가 출토되었고, 통일신라 시기에 제작된 금동향로가 출토되었는데 이는 미륵사의 사세가 통일신라 시기에도 여전히 융성하였음을 보여 준다. 익산 미륵사지 금동향로[보물 제1753호]는 동물의 형상을 한 다리 4개를 갖추고 있다. 이러한 양식[수각향로[獸脚香爐]]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출토된 것으로 금속공예 연구의 귀중한 자료이며, 백제의 공예 기술이 한층 더 발전했음을 보여 준다. 왕궁평성[익산 왕궁리 유적, 사적 제408호]은 보덕국 해체 이후 궁성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대관사’라는 이름의 사찰로만 운영되었는데, 사찰 유적에서 출토된 기와와 청자를 통하여 중국과도 교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국보 제289호]은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 사이의 시기에 건립한 것으로 보고 있다.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 시기에 익산 지방에 큰 관심을 보인 인물은 후백제의 견훤이었다. 또한 견훤은 922년 미륵사에서 개탑(開塔) 의식을 거행하여 백제 계승의식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미륵사와 대관사는 익산 지역의 중요 사찰로서 견훤의 후백제 시기에 익산 지역이 다시 한 번 부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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