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5005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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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久庵遺槁 |
영어공식명칭 | Guam-yugo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전라북도 익산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봉곤 |
간행 시기/일시 | 1640년 - 『구암유고』 간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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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처 | 고려대학교 도서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로 145[안암동5가 1-2] |
성격 | 문집 |
저자 | 한백겸 |
편자 | 한흥일 |
간행자 | 한흥일 |
권책 | 2권 1책 |
행자 | 10행 18자 |
규격 | 28.0×19.5㎝ |
어미 | 내향2엽 화문어미(內向二葉花紋魚尾) |
권수제 | 구암유고 |
판심제 | 구암집 |
[정의]
전라북도 익산 출신인 조선 전기 학자 한백겸의 문집.
[개설]
『구암유고(久庵遺槁)』는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출신인 한백겸(韓百謙)[1552~1615]의 글들을 모은 문집이다. 한백겸은 화담 서경덕(徐敬德)의 학맥을 계승한 인물로서, 주역과 예학에 뛰어났고 실증적인 측면을 강조하여 많은 업적을 남겼다. 특히 역사와 지리를 연결하여 펴낸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는 역사지리학의 효시이며, 『구암유고』에 나타나는 정전제(井田制), 삼한설(三韓說), 심의설(深衣說), 사단칠정설(四端七情說) 등은 당대와 후대의 학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구암유고』는 현재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에 있는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저자]
한백겸은 역학과 예학에 뛰어난 선조 때의 학자로서, 자는 명길(鳴吉), 호는 구암(久庵), 본관은 청주이다.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군 금마면[현 익산시 금마면] 출신이다. 경성판관 한효윤(韓孝胤)과 평산신씨 예빈시정(禮賓寺正) 신건(申健)의 딸 사이에서 1552년 장남으로 태어났다. 인조(仁祖)의 장인인 한준겸(韓浚謙)은 한백겸의 동생이다. 한백겸은 열일곱 살 때에 서경덕의 제자인 민순(閔純)에게서 『소학(小學)』과 『근사록(近思錄)』을 배움으로써 서경덕의 학맥을 이었다. 스물아홉 살 때 부친상을 당하였으며 삼년상을 마치자 다시 한 달만에 할머니상을 당하였다. 이에 외부의 유혹을 끊고 성리학 공부에 힘써서 『역학계몽(易學啓蒙)』과 『논어(論語)』, 『맹자(孟子)』 등을 깊이 음미하고 연구하였다.
1585년(선조 18)에 교정청이 설치되면서 경술(經術)에 뛰어난 인물로 추천되어 교정랑에 임명되었다. 이때 정구(鄭逑), 최영경(崔永慶), 정개청(鄭介淸), 정철(鄭澈) 등 당대의 학자들과 함께 경서의 한글 풀이를 교정하였다. 1589년(선조 22) 기축옥사 때 역적으로 죽은 정여립(鄭汝立)의 조카 이진길(李震吉)의 시체를 거두어 준 죄로 고문을 받고 함경도로 유배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사면되었고, 함경도 지역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내자시직장이 되었으며, 1593년 한성부참군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에는 정경세(鄭經世)가 주역에 정통하다고 한백겸을 추천하여 경연에 입시하였다. 1595년에는 호조좌랑, 형조좌랑을 거쳐 안악현감이 되었으며, 다시 1600년 영월군수로 옮겼다가 1601년 2월 형조정랑이 되어 중앙에 돌아왔다.
1602년(선조 35) 왕명에 따라 주역에 대한 풀이를 교정하는 일에 참여하였으며, 1602년 8월 정3품 관직인 사도시정으로 승진하였고, 1604년(선조 37) 청주목사가 되었다. 이후 1607년 4월 정3품인 장예원판결사에 제수되어 중앙에 돌아왔고, 8월에는 호조참의에 제수되었다. 쉰아홉 살인 1610년(광해군 2) 12월 강원도안무사가 되었다. 이듬해 1611년(광해군 3) 겨울 파주목사에 제수되었으나 곧바로 사직하였다. 이후로는 현재의 서울특별시 은평구 수색동에 해당하는 양주 물이촌(勿移村)에 은거하였다. 경전을 탐구하다가 예순세 살 때인 1615년(광해군 7) 7월, 세상을 떴다.
[편찬/간행 경위]
한백겸이 세상을 떠난 뒤, 아들 한흥일(韓興一)이 한백겸의 친구와 문인들 사이에 전해지는 글들을 수합하여 1640년 이식(李植)의 서문을 받아서 간행하였다.
[형태/서지]
2권 1책의 목판본이다. 책의 사주(四周)에 두 개의 검은 선이 돌려진 사주 쌍변(四周雙邊)이다. 반곽의 크기는 19.0×15.0cm, 10행 18자이다. 어미는 내향2엽 화문어미(內向二葉花紋魚尾)이며, 책의 크기는 28.0×19.5cm이다.
[구성/내용]
『구암유고』는 시 없이 산문만 수록되어 있다. 상하 2권이다. 책의 앞머리는 이식의 서문으로서, 한백겸의 글이 전란 때 대부분 흩어져 잃어버리고 친구들과 문인 사이에 전해진 것에 불과하며, 한백겸의 학설은 중국의 정호(程顥)나 주자(朱子) 못지않다고 극찬하고 있다.
상권은 설(說), 변(辨), 기(記), 서(序), 발(跋)이 차례로 실려 있다. 「기전유제설(箕田遺制說)」, 「기전도(箕田圖)」, 「심의설(深衣說)」, 「심의도(深衣圖)」, 「사단칠정설(四端七情說)」, 「사단칠정도(四端七情圖)」, 「계몽설시변(啓蒙揲蓍辨)」, 「빈풍금등설(豳風金縢說)」, 「독다방해(讀多方解)」, 「회재논태극도후발(晦齋論太極圖後跋)」, 「동사찬요후서(東史纂要後敍)」, 「문음부경후(題陰符經後)」, 「조석변(潮汐辨)」, 「접목설(接木說)」, 「물이촌구암기(勿移村久菴記)」, 「비단입의서(碑壇立議序)」, 「송지봉이윤경영공조경서(送芝峯李潤卿令公朝京序)」, 「반시당기(返始堂記)」, 「계몽괘변도발(啓蒙卦變圖跋)」 등이 실려 있다. 그중에서도 「기전유제설」, 「기전도」는 한백겸의 대표적인 학문적 업적으로, 평양성 밖에 있는 기자의 정전이 실제 기자가 남긴 전제(田制)임을 증명한 것으로 조선 후기 실학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심의설」은 주석이 경문(經文)의 의미를 혼란시킨다고 보아 경전을 중시하여 방령심의설을 창안한 것이다. 「동사찬요후서」는 삼한과 한사군의 위치가 별개임을 주장한 것으로서, 이후 마한, 변한, 진한의 위치를 고증할 때 주요 고려사항이 되었다. 또한 「사단칠정설」과 「사단칠정도」는 칠정의 각 정에 사단이 내포되어 있다는 독창적인 견해로서, 후일 실학자인 유형원(柳馨遠)이 수용하였다.
하권은 상소와 전기(傳記)로 구성되어 있다. 「호조참의사직소(戶曹參議辭職疏)」, 「공물변통소(貢物變通疏)」, 「안무사사직소(安撫使辭職疏)」, 「선조통훈대부행문천군수 증의정부영의정부군행장(先祖通訓大夫行文川郡守贈議政府領議政府君行狀)」, 「영응이선생행장(永膺李先生行狀)」, 「유인정씨행장(孺人鄭氏行狀)」, 「홍하의행장(洪荷衣行狀)」 등이다. 이 가운데 「호조참의사직소」는 노모 병구완을 위해 사직한 것이고, 「안무사사직소」는 상복을 벗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데다가 몸에 병이 겹쳐 발령을 받기 어렵다는 사유를 밝힌 것이며, 「공물변통소」는 공물의 폐단이 크므로, 고을에서 쌀과 포목으로 편의에 따라 바치게 하자는 주장이다.
[의의와 평가]
한백겸에 대한 연구가 주로 『동국지리지』 위주로 이루어짐으로써 ‘역사지리학자’로서의 한백겸만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구암유고』는 한백겸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방면에 걸쳐 실학파에 영향을 끼쳤음을 알게 하는 중요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