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5006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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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韓百謙 |
영어공식명칭 | Han Baekkyoum |
이칭/별칭 | 명길(鳴吉),구암(久菴)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북도 익산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류호석 |
[정의]
조선 전기 익산 지역에 거주하였던 문신.
[가계]
한백겸(韓百謙)[1552~1615]의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자는 명길(鳴吉), 호는 구암(久菴)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정선군수 한승원(韓承元)이고, 할아버지는 문천군수 한여필(韓汝弼)이다. 아버지는 경성부판관 한효윤(韓孝胤)이며, 어머니는 예빈시정 신건(申健)의 딸 평산신씨(平山申氏)이다. 부인은 구사중(具思仲)의 딸 능성구씨(綾城具氏)이다.
『금마지(金馬志)』의 인물 항목에는 한백겸이 소세양(蘇世讓)의 아버지 소자파(蘇自坡)의 외증손 사위로 금마[현 익산시]에서 처가살이를 하였으며, 소영복(蘇永福) 등 금마의 진주소씨 일가와도 학문적 교류를 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활동 사항]
한백겸은 1552년(명종 7)에 태어났다. 1579년(선조 12) 식년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1585년 천거를 통하여 교정낭청이 되었다. 1580년 중부참봉을 거쳐 경기전참봉리 되었으며, 얼마 뒤에는 선릉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병 때문에 나아가지 않았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기축옥사(己丑獄事)에 연루되어 유배를 당하였다가 임진왜란 때 사면되었으며, 귀양지에서 왜군에게 붙어 반란을 선동한 자들을 죽인 공로로 내자시직장에 임명되었다. 1595년 호조좌랑을 역임하였고, 1601년 형조좌랑을 거쳐 청주목사로 부임하였다. 1607년에는 판결사·호조참의 등에 임명되었다. 1610년(광해군 2) 강원도안무사로 부임하였고, 1611년 파주목사로 부임하였다가 사직하고 경기도 양주에 거주하다가 1615년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한백겸의 저서로는 문집인 『구암집(久庵集)』과 중국의 사서(史書)들로부터 우리나라 지리에 관한 사항을 가려 뽑고 자신의 견해를 덧붙인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가 있다. 역학(易學)에 밝아 선조 때 『주역전의(周易傳儀)』를 교정하기도 하였다.
[묘소]
한백겸의 묘소는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 부평리 산1에 있다. 한백겸의 묘와 신도비는 경기도 기념물 제165호로 지정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한백겸은 사망한 뒤 영의정이 추증되었고, 강원도 원주시 호저면 산현리에 있었던 칠봉서원(七峯書院)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