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6007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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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慶州李氏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강만익 |
입향 시기/일시 | 1402년 - 경주이씨 입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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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지 | 경주이씨 입향지 - 제주도 서귀포시 구좌면 세화리 |
세거|집성지 | 경주이씨 집성지 - 제주도 제주시 외도동 한경면 조수리 |
세거|집성지 | 경주이씨 집성지 - 제주도 서귀포시 호근동·법환동 |
성씨 시조 | 이알평(李謁平) |
입향 시조 | 이미(李美), 이희관(李熙寬) |
[정의]
표암공(瓢巖公) 이알평(李謁平)을 시조로 하고 이미(李美)와 이희관(李熙寬)을 입도조(入島祖)로 하는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에 세거하는 성씨.
[연원]
제주도의 경주이씨는 신라 초기의 6촌 가운데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의 촌장으로 전하는 표암공(瓢巖公) 알평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신라 경주부의 토착 성씨로 이(李)·최(崔)·정(鄭)·손(孫)·배(裵)·설(薛)씨 등이 있었다. 그리고 서기 32년(신라 유리왕 9), 6촌(六村)을 6부(六部)로 개칭하면서 각기 성씨를 내렸는데, 양산촌(楊山村)은 급량부(及梁部)로 하면서, 이씨 성을 사성(賜姓)하였다. 이것이 경주이씨 등장의 연원이다. 경주이씨의 시조는 표암공(瓢巖公) 알평(謁平)이고, 중시조는 소판공(蘇判公) 이거명(李居明)이다. 그는 신라 진골로 시조 이알평의 원대손(遠代孫)이다.
경주이씨의 14개 대파는 평리공파(評理公派)·이암공파(怡庵公派)·익재공파(益齋公派)·호군공파(護軍公派)·국당공파(菊堂公派)·부정공파(副正公派)·상서공파(尙書公派)·사인공파(舍人公派)·판전공파(判典公派)·월성군파(月城君派)·직장공파(直長公派)·석탄공파(石灘公派)·진사공파(進士公派)· 교감공파(校勘公派)이다. 경주이씨는 고려 후기에도 크게 세력을 떨쳤고 조선에 들어와서도 문과 급제자 178명, 상신 8명, 대제학 3명을 비롯하여 10여 명의 공신과 많은 학자·명신을 배출하였다. 제주에 사는 경주이씨는 대부분 익재공파(益齋公派)·국당공파(菊堂公派)·상서공파(尙書公派) 후손들이다.
[입향 경위]
익재공파의 제주 입도조는 여말의 충신 이미(李美)이다. 그는 시조 알평의 원대손(遠代孫)이고, 중시조 소판공 거명의 20세이며, 익재공 이제현의 증손이다. 고려 말 우왕 당시 국운의 몰락으로 정세가 기울자 이성계의 득세 속에서 고려의 재건을 체념하고 벼슬을 버린 다음 초야에 묻히고 말았다. 조선 건국 10년 후인 1401년(태종 1) 임금이 관직을 주며 조정에 나오라는 명을 내렸으나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불복함에 따라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1402년에 이미의 형 이신이 도안무사로 제주에 부임해 일을 마친 다음 동년 11월에 떠날 때 한양으로 동행을 요청했으나 이를 거부하고 제주도에 정착하여 입도조가 되었다.
상서공파의 입도조는 중시조 25세인 이희관이다. 그는 폭정을 일삼은 연산군의 전횡에 환멸을 느낀 나머지 어려운 세태 속[무오사화]에서 벼슬길에 나서기를 단념하고 일신을 살리고 가문을 지탱하기 위한 안전 책으로 제주도에 입도했다. 그는 제주도에서 이영과 이영말이라는 아들을 두었고, 차자 이영말의 아들 이무춘은 덕득과 덕수 두 아들을 두었다. 장파 덕득의 후손들은 구좌면 세화리를 중심으로, 그리고 차파 덕수의 후손들은 조천읍 신촌리, 한림읍 귀덕리, 애월읍 상귀리, 안덕면 서광리 등지에 정착했다.
제주도 내에서 일약 명문으로 기초를 다진 것은 충효를 겸비한 입도조 이희관(李熙寬)의 6세손 이필완(李弼完)의 등장부터이다. 그는 임금으로부터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라는 교지를 받았으며, 아버지와 조부는 물론 그 증조까지 벼슬이 추증되었다.
[현황]
제주도의 경주이씨 익재공파(益齋公派)는 오늘날 1천여 명에 달하고 있다. 경주이씨들은 제주시 외도동, 한경면 조수리, 조천읍 북촌리, 서귀포시 호근동과 법환동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2000년 11월 현재 제주도에는 1954가구에 6540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서귀포시 지역에는 375가구에 453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