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6007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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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東萊鄭氏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강만익 |
입향 시기/일시 | 1492년 - 동래정씨 입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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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동래 - 부산광역시 동래 |
세거|집성지 | 동래정씨 집성지 - 제주도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
성씨 시조 | 정회문(鄭繪文) |
입향 시조 | 정질목(鄭秩睦) |
[정의]
정회문(鄭繪文)을 시조로 하고 정질목(鄭秩睦)을 입도조(入島祖)로 하는,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에 세거하는 성씨.
[개설]
동래정씨는 신라의 전신인 사로(斯盧)의 6부 촌장으로 정씨 성을 하사받았던 지백호의 원손이며, 안일호장(安逸戶長)인 정회문(鄭繪文)을 시조로 받든다. 또 보윤호장(甫尹戶長)을 지낸 정지원(鄭之遠)을 기세조(起世祖)로 하는데, 아들 정문도(鄭文道)는 안일호장(安逸戶長), 손자 정목(鄭穆)은 상서좌복야태부경(尙書左僕射太府卿)을 지내는 등 자손들이 현달하게 되어 그의 세거지인 동래(東萊)를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동래정씨는 1세 정지원의 6세에 들어와 교서랑〈보〉파(校書郞〈輔〉派)와 첨사공〈필〉파(詹事公〈弼〉派)파로 나누어지고, 교서랑공파는 전서공파(典書公派)·설학재공파(雪壑齋公派)·문경공파(文景公派)·참의공파(參議公派)·평리공파(評理公派)·참판공파(公派)로 나누어지고, 첨사공파는 호군공파(護軍公派)·윤창파(允昌派)·수찬공파(修撰公派)·직제학공파(直提學公派)·참봉공파(參奉公派)·대호군공파(大護軍公派)로 대별된다.
[연원]
제주의 동래정씨는 시조의 11세손으로 예조 참의를 지낸 정절(鄭節)의 후손들로 구성된 참의공파(參議公派)가 다수를 차지하며, 다시 후손들은 승사랑공계와 어모공계로 나누어진다.
[입향 경위]
동래정씨가 어떤 연유로 제주에 입도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조선이 건국한 지 1백 년쯤 되던 시기에 당쟁과 사화로 국정이 극히 혼란한 시기에 입도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제주 입도조는 절의 손자 중훈대부(中訓大夫) 보공장군(保功將軍) 정질목(鄭秩睦)이다. 제주에 입도하여 정착한 정질목은 승순(承順)과 옥문(玉文) 두 아들로 하여금 가계를 계승케한다. 승순은 승사랑 수의부위(承仕郞修義副尉)을 역임하였고, 17세 그의 손자 윤강(允剛)은 충무위부사정(忠武衛副司正)에 오르고 건공장군(建功將軍)과 중직대부(中直大夫)를 역임하였다.
[현황]
이후 17세 윤강의 후손들이 제주시 오라리를 중심으로 산북에 널리 번성하였고, 제주시 봉개동 주토악에 그 비와 함께 쌍분이 조성되어 있어 선조들과 함께 매년 음 3월 3일 시향을 봉행하고 있다. 정옥문의 손자인 어모장군 유향좌수를 역임한 정형창(鄭亨昌)은 서귀포시 남원읍 남원리에 삶의 터전을 잡아 살았는데, 후손들이 그의 묘를 남원면 한남리 1030번지 속칭 고남수(古南水)에 안장했으니, 이 후손을 동래정씨 어모공파, 혹은 고남수파라 부르고 있다. 매년 음 3월 6일 후손들이 모여 선조들과 함께 시향을 봉행하고 있다.
2000년 11월 현재 제주도에는 2,002가구에 6,295명이 살고 있으며, 서귀포시 지역에서는 표선면 토산리 등에 790가구 2,317명이 거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