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6007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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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順興安氏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강만익 |
[정의]
안자미(安子美)를 시조로 하고 안득경(安得敬)·안수도(安秀道)·안수억(安壽億)을 입도조(入島祖)로 하는,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에 세거하는 성씨.
[개설]
문헌에는 안씨의 본관이 109본이나 되는 것으로 전하나. 순흥·광주·죽산·탐진·공산·충주·동주·안산·제천·안강 등이 주요 본관으로 손꼽힌다.
[연원]
순흥안씨는 전체 안씨 인구의 과반수를 상회한다. 시조 안자미는 고려 신종 때 흥위위보승별장(興威衛保勝別將)을 지내고 흥령현(興零縣)[순흥의 별칭]에 정착하였으며 신호위상호군(神虎衛上護軍)에 추봉되자 후손들은 순흥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제주도에 거주하는 순흥안씨는 한림공파(翰林公派)·감찰공파(監察公派)·참찬공파(參贊公派) 등 3파로 갈라진다.
[입향 경위]
제일 먼저 입도한 순흥안씨는 한림공파(翰林公派)의 파조인 안득경(安得敬)[시조 안자미의 10세손]으로 1401년(태종 1)에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으로 이방번·이방석 두 왕자가 살해되는 등 골육상잔이 벌어지자 정치에 환멸을 느껴 입도하였다. 두 번째 입도한 감찰공파의 파조인 예조 참의 안수도(安秀道)[시조 안자미의 13세손]는 1498년(연산군 10)에 무오사화가 일어나 무고한 선비들이 참변을 당하자 가문을 보호하기 위해 애월읍 납읍리에 입도했다. 다음이 참찬공파 파조는 안수억(安壽億)[안자미의 17세손]으로 1610년(광해군 2)에 임진왜란 후 가세가 기울자 제주에 입도했다.
이 중 순흥안씨 감찰공파는 제주 애월에 정착한 후 그의 아들 안보상(安甫尙)은 조천면 선흘리로 옮겨가 살게 되었으나 그의 아들 순손(順孫) 대에 이르러 다시 애월읍 납읍에 정착하여 살았다. 그의 손자 의인(義仁)에게 아들 3형제가 있어 맏이 안홍국은 납읍에 머물러 살고, 둘째 안홍남은 다시 선조가 살던 땅 조천면 선흘리에 살았다. 막내 안홍대는 표선면 가시리로 이주하여 각각 정착 생활의 토대를 닦았다.
참찬공파(參贊公派)의 입도조 안억경은 아들 명길, 손자 모남으로 혈통이 이어졌는데, 모남의 두 아들 안태량과 안태근이 구좌읍 김녕리로 옮겨 살면서부터 토착화하여 이곳을 중심으로 많은 후손이 번성하였다.
[현황]
제주의 순흥안씨 중 감찰공파는 3파 중 가장 후손이 번창한 가문이며, 한림공파는 한경면 일대를 근거지로 후손들이 번창해 왔고, 오늘날에는 제주도 전역에 고루 분포되어 있으며 인구 면에서 감찰공파에 이어 두 번째를 차지하고 있다.
2000년 11월 현재 제주도에는 1,029가구에 3,465명이 살고 있으며, 서귀포시 지역에는 하원동 등지에 241가구, 794명이 거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