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6008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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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張希載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재형 |
[정의]
조선 후기 제주도 대정현에 유배된 무신.
[가계]
본관은 인동(仁同). 아버지는 사역원 부공사 장경이며, 역관 장현(張炫)의 종질이다. 숙종의 비이고 경종의 어머니인 장희빈의 오빠이다.
[활동사항]
장희재(張希載)[?~1701년]는 장희빈의 오빠로 장희빈이 숙종의 총애를 독차지하자 금군 별장이 되었다가 1692년(숙종 18) 총융사로 승진하였다.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인현왕후가 복위하자 장희빈과 함께 인현왕후를 해하려고 모의하다가 발각되어 사형을 받게 되었으나 세자[후일 경종]에게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한 남구만(南九萬) 등 소론(少論)의 주장으로 대정현으로 유배되었다.
장희재 유배 후 장희빈은 별궁에 있으면서도 인현왕후를 시기해서 원망한 나머지 영숙궁에 천의신당을 마련하여 무당으로 하여금 중전이 빨리 죽도록 밤낮 기도하게 하는 한편 중전의 화상을 천정에 매달아 궁녀가 매일 세 번씩 활로 그것을 맞추어 종이가 찢어져 떨어지면 비단옷을 입혀 주변에 묻는 등 주술을 부렸다. 장희재 역시 대정현 유배지에서 한글 편지로 궁인과 연락을 하면서 인현왕후의 살해를 모의하였다.
1701년(숙종 27) 인현왕후가 죽은 뒤에 희빈 장씨가 인현왕후를 무고(巫蠱)하여 저주한 사실이 발각되어 장희재를 극형에 처할 것을 요구하는 상소가 있자 왕은 처음에는 거절하였으나 결국 국모 모해죄(國母謀害罪)로 장희빈은 동년 10월10일 사약을 받아 죽었고 장희재도 대정현 유배소에서 서울로 이송 되어 동월 29일 군기고 앞에서 공개로 주살되었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민암(閔黯)·유명견(柳命堅) 등이 유배되었고 장희재의 아들 장종경과 며느리 실애도 유배되었다가 1724년(경종 4)에 석방되었다.
[묘소]
장희재의 묘소는 본래 서울특별시 은평구 불광동에 있었으나, 1970년대 초 이 일대가 개발되면서 후손들이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중산동 산96-1번지[고봉산]으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