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6015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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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儀禮服 |
분야 | 생활·민속/생활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집필자 | 현진숙 |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 시민이 의례를 거행할 때 입는 옷.
[개설]
사람들은 일생을 통하여 사회적인 지위와 인정을 받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단계들이 있고, 이때는 반드시 특별한 의례를 행하게 되는데 이를 통과 의례라고 한다. 서귀포 시민들은 이와 같은 의례 때 평상시 입던 옷이 아닌 특별한 옷을 입으며, 이를 의례복이라고 한다. 의례복으로는 아기가 태어나서 맨 처음 입는 의복인 봇뒤창옷과 혼례 때 입는 혼례복, 상례 때 입는 상복과 죽은 다음 저승으로 갈 때 입는 호상옷이 있다. 성인이 되는 표상인 관례는 통과 의례에 포함되지만 서귀포시에서는 따로 있지 않았다. 대개 예전에는 관례를 치를 나이가 혼인할 나이였기 때문에 혼례를 치르면 성인으로 취급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각종 제례에 입는 제복이 있다.
1. 봇뒤창옷
서귀포시에서 아기가 태어나면 아무 옷도 입히지 않고 헌 갈중이에 싸 가만히 눕혀 두었다가 사흘이 되면 목욕을 시키고 비로소 옷을 입히는데 존비, 빈부에 상관없이 누구나 봇태창옷·봇뒤창옷·봇뒤적삼·베옷·베창옷·삼칠일옷 등으로 부르는 배냇저고리를 입혔다.
봇뒤창옷은 옷의 기능 중에서 몸을 보호하는 기능보다는 주술적인 의미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 아기가 태어나서 아무 탈 없이 잘 견뎌주길 바라는 염원과 잘 지켜 준 삼신할망에 대한 감사와 조심하는 의미가 담겨진 출생 의례복이다. 봇뒤창옷은 육지의 배냇저고리와 다르다. 재료는 계절에 상관없이 삼베이다. 형태는 저고리를 기본으로 하면서 뒤쪽 중앙이 반 정도 터졌으며 소매는 통폭으로 하여 아기가 온전하게 잘 자라길 바라는 염원을 담았고, 고름은 무명실로 장수의 염원이 담겨 있다. 그런데 이 옷은 아기가 태어나서 무사하다고 해야만 만들었지 미리부터 옷을 만든다고 부산을 떨면 숭시[凶事]난다고 믿었다. 그리고 손이 귀하거나 아기가 건강하게 잘 자라지 못하는 집안에서는 무병장수하고 복덕(福德)있는 할머니의 속옷을 얻어 와서 해 입히거나 아기가 잘 자라는 집의 옷을 빌려와서 입혔다. 그리고 이 옷은 복이 깃든 옷이므로 다른 사람에게 빌려 주었다가도 반드시 돌려받았다.
2. 혼례복
혼례복은 일제 강점기에 서양 문물이 들어오면서 혼례복에도 이분화가 시작되었다. 신랑, 신부가 입는 예복에 따라서 신식, 구식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구식 혼례는 신랑이 사모관대를 하고, 신부는 장옷이나 원삼에 족두리 차림으로 혼례를 치르는 것을 말하고, 신식 혼례는 양복을 입고 면사포를 쓰는 것을 말한다.
조선 시대 남자는 관직이 없어도 평생 한 번 혼례 때만큼은 관복 입는 것을 허락하여 서민들도 사모를 쓰고 단령을 입고 대를 두르고 목화를 신었다. 일제 강점기에 단발령으로 머리를 깎아도 초기에는 전통 혼례복을 입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양복이 들어오게 되고 지식층에서 양복을 입고 혼례를 치르게 되면서 차츰 양복 차림으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1940년대는 전시복인 국민복을 입거나 예복을 갖추지 못한 경우는 바지저고리 위에 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쓰고 혼례를 치르기도 하였다.
신부 혼례복은 장옷을 입고 장옷을 머리에 쓰는 차림으로 독교를 타다가 차차 원삼에 족두리 차림으로 가마를 타는 것으로 바뀌어갔다. 장옷은 육지에서는 쓰개류였지만 서귀포시에서는 혼례복이나 호상옷으로 입었다. 그리고 육지의 장옷은 소매 끝에 흰색의 넓은 단을 달지만 서귀포시에서는 붉은색으로 소매 끝동과 섶, 고름, 깃 등을 달았다. 장옷은 1940년대까지도 혼례복은 최대의 정장으로 머리에 쓰는 장옷은 보통 신랑 집에서 마련하여 가져왔고 입는 장옷은 신부가 빌려 입거나 장만하여 입고 왔다.
광복 전후 약 10년부터는 장옷과 원삼이 혼용되다가 차츰 원삼을 입었다. 원삼은 궁중이나 반가(班家)에서만 입었는데 조선 후기에 일반 서민의 혼례복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서귀포시에서는 각 마을마다 계를 조직하여 사모관대와 원삼과 족두리 가마 등을 빌려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신부 혼례복도 신랑보다는 늦었지만 서양화 바람이 불어 흰색 저고리 치마 차림에 면사포를 쓰는 등 차차 서양화 되어갔다.
3. 호상옷
호상옷은 죽은 사람에게 입히는 수의로 서귀포시에서는 저승옷이라고도 한다. 육지에서 삼베로 수의를 만드는데 반해 서귀포에서는 명주로 만들며 남자는 기본이 되는 저고리 바지 외에 큰 옷인 도포를 수의로 장만하고, 여자는 혼례 때 입었던 옷을 저승 갈 때도 입고 갔다. 그런데 혼례가 신식으로 바뀌어도 호상옷은 옛날 그대로 장옷이나 원삼을 준비하고 있다.
4. 상복(喪服)
상복은 상중(喪中)에 있는 상주나 복인(服人)이 입는 예복을 말한다. 상복은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죽은 사람을 보내기 위한 산 사람들의 예의 표현 방법이기 때문 엄숙하게 갖추어 입었다. 서귀포시에서 상례는 종교와 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전통적으로 상주는 입관 전까지는 상복을 입지 않았다.
예전에 남자 상주는 초혼을 한 뒤에 흰 두루마기를 입되 한쪽 어깨를 내놓아 입고 머리에는 통 두건을 쓰고, 여자 상주는 쪽진 머리를 풀었다. 입관을 마치고 나서 성복(成服) 즉 상복을 입는다. 남자 상주는 굴건제복이라고 해서 머리에 망건, 굴건, 수질을 두르고, 제복(祭服)을 입는데 이를 참최복이라 한다. 참최복을 입고 허리에 요질을 두르고 행전을 차고 발에는 시깍신이라고 하는 성글게 짠 짚신을 신었다. 지팡이는 부상(父喪)인 경우 대나무, 모상(母喪)인 경우는 머귀나무 지팡이를 짚었다. 여자 상주는 대수장군(大袖長裙)을 입고 머리에 베너울을 썼다.
5. 제례복
제례복은 제사를 올릴 때 입는 옷으로 보통 두루마기나 도포를 입고 유건을 썼다. 지금도 유건을 쓰고 두루마기나 도포 차림으로 제사를 올리기도 하지만 유건 없이 초헌관만 도포를 입고 나머지는 두루마기 차림이거나 양복을 입고 제를 지내는 경우가 많다. 마을의 안녕과 단합을 위해 정월에 좋은 날을 택해 마을 포제를 지내는데 이때는 청도포를 입고 유건을 쓰고 청색의 행전을 찼다. 청도포는 보통 삼베에 청색 물을 들인 것으로 향교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입는 것이라 하여 귀하게 여겼다.
평상복이 양복으로 바뀌었지만 의례복에서는 아직도 전통적인 요소가 많이 남아 있다. 봇뒤창옷은 1960년대까지도 입혀졌지만 지금은 다른 지역과 같은 배냇저고리를 입히고 있다. 혼례복에서도 1950년대에는 신구식이 혼용되다가 1960년대~1970년대부터는 예식장이 생겨나고 구식 혼례의 모습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호상옷은 혼례가 신식으로 변하였어도 아직도 전통적으로 장만하는 경우가 많다. 다만 여자의 속옷 중에 소중이는 현대의 팬티 모양으로 만들기도 하고 장옷이나 원삼을 색깔 있는 것 보다는 소색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상복도 간편화 되어 두루마기와 형태는 같지만 소매가 두리소매고 두지개포를 달고 뒤는 겨드랑이에서 무를 덧달았다. 허리띠도 삼베로 만든 띠를 매는 등 간소화되었다. 근래 들어 검은 양복을 입는 경우가 많다. 여자 상주도 치마와 저고리에 베너울 대신 건대를 쓰거나 수건을 쓴다. 또한 남자와 마찬가지로 검은색으로 한복을 입기도 한다.
서귀포시에서는 환갑잔치하면 빨리 죽는다는 말이 있어서 그런지 회갑을 맞이해서 특별히 잔치를 벌이지 않았다. 근래에 와서 여유가 있는 집에서는 환갑잔치라고 해서 상을 차리고 기념사진을 촬영하는 수도 있었으나 요즘에는 이것마저도 사라지고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