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6020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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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三郡戶口家間摠冊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송문기 |
편찬 시기/일시 | 1904년 1월 - 『삼군호구가간총책(三郡戶口家間摠冊)』 편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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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처 | 제주대학교 박물관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제주대학로 102 |
성격 | 책|호구책 |
표제 | 광무 8년 1월 일 삼군호구가간총책(光武八年一月日三郡戶口家間摠冊) |
[정의]
1904년 1월 제주·대정·정의 3군(郡)의 호구와 집의 형태를 기록한 총책(摠冊).
[개설]
『삼군호구가간총책』은 「삼군호구가간존안책(三郡戶口家間存案冊)」과 「삼군호구가간상납총(三郡戶口家間上納摠)」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삼군호구가간존안책」은 당시 제주도에서 보관 중이던 문건으로 보이며, 「삼군호구가간상납총」은 실제로 호구와 집의 칸수인 가간(家間)을 조사하여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면(面)·리(里) 별 가구 수와 남녀 인구 수, 초가(草家) 및 와가(瓦家) 수가 차례로 기록되어있다.
대정군과 정의군은 「삼군호구가간존안책」에만 면·리 별로 구분되어 있고 「삼군호구가간상납총」에는 면·리 별 구분 없이 총 상납총만 기재되어 있다.
[편찬/간행 경위]
『삼군호구가간총책』은 1896년 호구조사규칙의 공포에 따라 새로 보급된 호적양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 중 하나가 가택(家宅)에 대한 사항이다. 자기 소유[己有]인지 임대[借有]인지, 그리고 기와집[瓦]인지 초가집[草]인지와 칸수[間數]를 기재토록 한 것이다. 호구조사세칙의 목적은 분명하지 않으나, 호구와 인구수의 총수 등 현황을 정확히 파악하여, 새로운 호적에 편제된 호(戶)에 세금을 징수하기 위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서지적 상황]
표제는 ‘광무 8년 1월 일 삼군호구가간총책(光武八年一月日三郡戶口家間摠冊)’이며 크기는 가로18.3㎝, 세로 29.0㎝이고 1책 66장으로 되어 있다.
[구성/내용]
대정군의 경우 좌면(左面)에는 강정·영남·월평·도순·하원·도문·대포·상문·동중문·중문·색달·상예·하예리가, 중면(中面)에는 창천·상천·감산·통천·화순·광평·동광청·광청·덕수·사계리가, 우면(右面)에는 안성·인성·보성·상모·하모·동일과·일과·신평·영락·무릉·도원리가 기록되어 있는데 총 3면(面) 34리(里)이다.
「삼군호구가간존안책」에 기록된 총 호수는 4,084호인데 실제로는 2,723호가 살고 있었다. 기와집은 없고 초가집만 있었는데 총 칸수가 존안책에는 6,821칸 상납총에는 6,489칸으로 되어 있다. 기록을 통해서 당시 대정군 사람들이 1~2칸 정도되는 초가집에서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호구 수는 창천리가 300호로 가장 많고, 통천리가 9호로 가장 적다. 인구수는 하모리가 892명으로 가장 많고, 통천리가 45명으로 가장 적다.
정의군은 대정군 보다 1면(面)이 많은 4면(面) 47리(里)로 편제되어 있다. 좌면(左面)에는 역돌·오조·고성·성산·수월·화남·온평·난산·신산·삼달·신례·신평·하천·신천·성읍리가, 동중면(東中面)에는 좌선·표선·세화·동가·가시·안좌·토산리가, 서중면(西中面)에는 온천·수망·동수·동영·신영·한남·보한·동보·서영·동미·신미·위미·예촌·하례리가, 우면(右面)에는 상효·중효·하효·보목·토평·동홍·서홍·호근·풍덕·법환리가 기록되어 있다.
「삼군호구가간존안책」에 기록된 총 호수는 4,572호인데 실제로는 4,243호가 살고 있었다. 기와집은 온평리에만 3칸이 있었고, 모두 초가집이다. 초가집의 총 칸수는 존안책에 1만2052칸, 상납총에는 9,442칸으로 되어 있다. 기록을 통해서 당시 정의군 사람들이 2~3칸 정도 되는 초가집에서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호구 수는 법환리가 317호로 가장 많고, 신풍리가 24호로 가장 적다. 인구수는 법환리가 1,332명으로 가장 많고, 화남리가 135명으로 가장 적다.
당시 서귀포시 지역의 실제 호구는 6,966호이고, 인구는 3만4724명이다. 그리고 초가집의 총 칸수는 1만5831칸이다. 이를 통해 당시 서귀포시 지역 사람들은 평균 2칸 정도 되는 초가집에 5명 정도가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삼군호구가간총책』은 1896년 호구조사규칙의 반포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당시 서귀포 지역의 가옥 구조와 인구수를 파악할 수는 중요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