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천도와 서동·선화의 사랑 이야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500001
한자 益山遷都-薯童善花-
영어공식명칭 Capital Relocation to Iksan, and The Love Story of Seodong and Seonhwa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북도 익산시
시대 고대/삼국시대/백제
집필자 한정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639년 - 익산 미륵사지 석탑 축조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62년 12월 20일 - 익산 미륵사지 석탑 국보 제11호 지정

[정의]

전라북도 익산 지역을 배경으로 한 서동선화공주의 사랑 이야기와 익산 천도설의 배경.

[개설]

한국의 고대사 자료는 양적 측면에 그리 풍부하지 않다. 대부분의 연구가 김부식(金富軾)[1075~1151]의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일연(一然)[1206~1289]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김부식은 중국 역사서에 기록된 삼국의 내용이 소략하고, 당시 현존하던 역사서들이 거칠고 비속하여 새로운 역사서를 통하여서 국왕과 신하들의 잘잘못을 가려 후세의 교훈으로 삼고자 『삼국사기』를 편찬하였다. 『삼국사기』는 편년체(編年體)로 구성되었다. 반면 일연은 『삼국사기』가 편찬자의 시각에서 지나치게 합리성을 강조하며 중국 중심적 시각에서 탈피하지 못함을 인지하고, 불교적 내용이 무시되거나 소홀히 다루어진 것 등을 보충한다는 측면에서 『삼국유사』를 편찬한다고 밝혔다. 그래서 일연의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에서 찾아볼 수 없는 내용들, 즉 기층에서 광범위하게 이야기되는 설화 등이 다수 수록되어 있다.

『삼국사기』는 한국 고대사 연구의 기본 자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국사기』만 가지고 삼국시대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조망하기에는 부족함이 많다. 『삼국유사』 자체가 하나의 역사서로 충분한 자격을 지니고 있지만 『삼국사기』와 보완적 위치에 놓여 있을 때 가치는 증대된다. 『삼국유사』가 역사 텍스트로 규정되면서 제기되는 문제가 ‘역사의 설화화’, ‘설화의 역사화’이다. ‘역사의 설화화’는 역사적 사건이 사람들 사이에 전하여지면서 이야기화되는 양상을 일컫는 말이며, ‘설화의 역사화’는 역사적 기술이 부재한 상황에서 기층의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처럼 인지되면서 전승되는 양상을 가리킨다. 『삼국유사』의 많은 이야기들이 『삼국사기』에 기록되지 않은 경우가 많고, 기층에서 전하는 이야기를 통하여서 역사를 탐색하는 과정에서 ‘설화의 역사화’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삼국유사』 기이(紀異) 편의 제2 무왕(武王) 조의 이야기, 일명 ‘서동과 선화공주의 이야기’는 ‘설화의 역사화’ 논쟁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내용이다. 무왕(武王)[?~641]과 서동(薯童)은 동일한 존재인가? 무왕선화공주(善花公主)는 과연 부부의 연을 맺었는가? 무왕선화공주미륵사(彌勒寺)를 창건하였는가? 『삼국사기』의 기록에 보이지 않은 미륵사는 과연 백제의 사찰인가? 설화 속 이 내용들은 역사적으로 규명되어야 할 문제였다.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 이야기]

『삼국유사』 기이편 제2 무왕(武王) 조에 실린 서동선화공주의 이야기는 역사적으로 규명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진위 여부를 떠나서 과거부터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서동선화공주의 이야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백제 제30대 무왕(武王)의 이름은 장(璋)이다. 이 태어나기 전 의 어머니가 서울의 남쪽 못가에 집을 짓고 홀로 살고 있었다. 집 옆의 못에는 용(龍)이 있었다. 용은 여인의 미모에 반하여서 집을 방문하고 하룻밤을 묵고 떠났다. 여인은 용이 떠난 후에 아이를 임신하였고, 시간이 흘러 남자아이를 출산하였다. 어릴 적부터 재주와 도량이 뛰어났던 아이는 집 주변의 마[薯蕷]를 캐서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사람들은 마를 캐는 아이라 하여 아이를 ‘서동(薯童)’이라 불렀다.

서동은 신라 진평왕(眞平王)[?~632]의 셋째 공주 선화(善花)[혹은 善化]가 매우 아름답다는 소문을 들었다. 서동선화공주와 결혼하기로 마음먹고 신라의 서울인 경주로 갔다. 서동은 동네 아이들에게 마를 나누어 주고 친하게 지내면서 아이들에게 노래를 가르쳐 주었다. 노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선화 공주님은/남몰래 짝지어 두고/서동방을/밤에 몰래 안고 간다네”

이 노래는 신라 사람들이 즐겨 불렀다는 ‘향가(鄕歌)’이다. 일명 「서동요(薯童謠)」라 불리는데, 4구체 형식을 띠고 있다. 향찰은 한자의 음(音)과 훈(訓)을 빌려 우리말식으로 표기한 문자인데, 향찰을 이용하여서 작사한 노래가 향가이다. 「서동요」는 사람들의 입을 통하여서 경주 전역에 전파되었고, 결국 궁궐에까지 알려졌다. 신하들은 선화의 불찰을 진평왕에게 고하면서 유배 보낼 것을 청하였다. 신하들의 성화를 이겨 내지 못한 왕은 선화를 궁에서 내쫓아 유배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왕후는 선화가 떠나는 날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였다. 그리고 선화가 유배지에서 편안히 살 수 있도록 금 한 말을 내주었다.

선화가 유배지에 도착할 즈음, 한 사내가 나타나 인사를 하고 자신이 모시겠다고 나섰다. 선화는 사내의 정체를 알 수 없었으나 어딘가 모르게 믿음이 갔다. 사내는 성심껏 선화를 보필하였고, 이내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다. 선화는 사내의 이름이 ‘서동’이라는 사실을 알고 놀라면서, 아이들이 불렀던 노래가 허튼 소문이 아님을 깨달았다. 선화서동과 함께 살기를 모색하면서 왕후가 준 금을 밑천으로 장사를 하려고 하였다. 서동선화가 가져온 금을 보면서 자신이 마를 캐는 곳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고 자랑하였다. 선화는 짐짓 놀라면서 서동에게 금은 천하에 보물이니 이를 모아서 부모님이 계시는 궁궐에 보낸다면, 두 사람의 결혼을 인정하여 줄 것이라고 말하였다.

서동은 산더미처럼 금을 모았고, 평소 친분이 있던 용화산(龍華山)[익산의 미륵산] 사자사(師子寺) 지명법사(知命法師)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지명법사는 신통력을 발휘하여서 선화의 편지와 함께 금을 하룻밤 사이에 진평왕이 머무는 궁궐로 보냈다. 진평왕은 신하들의 불평에 어쩔 수 없이 선화를 유배 보냈지만, 아버지로서 항상 딸을 그리워하며 가슴 아파하고 있었다. 하루는 진평왕이 왕후와 함께 선화를 생각하며 궁을 걷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알 수 없는 강한 불빛이 비치면서 뜰에 많은 금이 나타났다. 진평왕과 왕후는 눈앞에 벌어진 일을 믿을 수 없어서 가까이 가서 보니 눈에 익은 글씨의 편지 한 통이 놓여 있었다. 선화서동과 만나서 결혼하게 된 사연, 금을 얻어서 보내게 된 사연을 글로 적어 보낸 것이었다. 진평왕과 왕후는 선화의 소식을 듣고 기뻐하였고, 서동을 사위로 인정하였다.

서동선화의 도움으로 부자가 되었고, 인심을 얻어서 백제의 무왕이 되었다. 무왕선화사자사지명법사를 만나기 위하여서 행차할 때였다. 무왕선화가 못가를 지나가는데, 갑자기 미륵삼존(彌勒三尊)이 나타나 수레를 멈추었다. 선화는 미륵삼존이 나타난 것을 상서로운 일이라 생각하고, 무왕에게 못을 메워서 절을 짓자고 제안하였다. 무왕선화의 제안이 일리 있다 생각하고 지명법사에게 가서 도움을 청하였다. 지명법사는 하룻밤 사이에 산을 허물어 못을 메우고, 미륵법상(彌勒法像) 세 개와 회전(回殿), 탑(塔), 낭무(廊廡)를 각각 세 곳에 세웠다. 진평왕은 딸과 사위가 절을 짓는다는 소식을 듣고 여러 공인들을 보내 돕도록 하였다. 무왕선화는 이 절을 ‘미륵사(彌勒寺)’라 불렀다.

[서동과 선화공주 이야기의 중요 모티프]

서동선화공주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 수밖에 없는 몇 가지 요소를 지니고 있다.

첫째, 계급 신분을 초월한 사랑 이야기이다. 서동은 이야기에서 미천한 신분으로 등장한다. 어머니는 못가에 홀로 집을 짓고 살았으며, 서동은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지도 못한다. 또한 서동은 산에 있는 마를 캐어 팔아서 어머니를 봉양하며 생계를 유지한다. 반면 선화는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왕족이다. 삼국시대는 강력한 신분제로 체제를 유지하는 사회였다. 특히 신라는 골품제(骨品制)라는 신분제도가 강력히 작동하는 사회였다. 능력이 뛰어나고 많은 부를 가지고 있어도 출생할 때부터 자신에게 주어진 신분은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런 측면에서 서동선화의 만남은 파격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둘째, 신화적 요소를 간직한 영웅의 이야기이다. 신화와 전설은 주인공의 성격과 서사의 체계에 있어서 조금 다른 모습을 보인다. 우선 신화는 신성(神聖)의 조건에서 태어난 주인공이 비범한 능력을 이용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고난과 역경을 이겨 내고 새로운 세계 질서를 창조한다는 내용이다. 반면 전설은 평범하다 못해 미천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주인공이 비범한 능력을 가지고 자신 앞에 놓인 고난과 역경을 이겨 내려고 시도하지만 기존의 세계 질서에 막혀 실패하고 죽음에 이른다는 내용이다. 그래서 신화의 주인공은 귀족적 영웅이라 하며, 전설의 주인공을 민중적 영웅이라 한다. 그런데 한국의 신화는 일반적으로 건국신화가 주종을 이루며, 귀족적 영웅은 천부지모(天父地母)의 결합을 통하여 세상에 출현하게 된다. 귀족적 영웅은 민족과 국가 단위에서 사람들에게 신성한 존재로 인식되지만 기층의 사람들과 심리적으로 거리감을 지니게 된다. 반면 민중적 영웅은 평범한 집단 속에서 출현한 존재이며, 기층 사람들이 바라는 꿈과 세계를 실현하여 줄 존재로 인식된다. 오히려 기층의 사람들은 귀족적 영웅보다 민중적 영웅에게 친밀감을 느낀다. 서동은 신화의 귀족적 영웅과 전설의 민중적 영웅을 결합한 인물이다. 계급적으로 기층에 속한 인물이 자신의 재능과 선화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르고, 나아가 기층의 꿈을 수렴한 세계를 창조하는 모습까지 보인다. 서동은 한국의 설화 문학에서 나타난 영웅의 모습에서 특별한 존재로 인식된다.

셋째, 기층민이 갈망하는 세계의 모습을 그려 내고 있다. 이야기에서 서동선화는 미륵삼존을 만나게 된다. 이를 계기로 선화서동에게 미륵사 창건을 제안한다. 미륵신앙은 삼국시대를 전후하여 민간의 대중적 신앙으로 자리 잡았다. 미륵삼부경(彌勒三部經)에 의하면, 미륵은 인도의 브라만 집안에서 태어나서 석가의 가르침을 받다가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受記)를 받고 도솔천(兜率天)으로 올라갔다고 한다. 미륵은 도솔천에서 천인(天人)을 교화하며 기다리다 석가가 입멸한 지 56억 7000만 년 후가 되면 현생에 성불하여 설법을 하고 중생을 구제한다. 서동선화공주의 이야기는 미륵사 창건이 미륵신앙에 기반하고 있다는 증거들로 가득 차 있다. 미륵삼존의 출현이나 지명법사사자사용화산에 있다는 것은 미륵신앙의 근거로 제시된다. 미륵신앙은 정치적으로 혼란할 때에 기층의 여론을 조성하는 데 자주 이용된다. 후삼국 시대의 견훤(甄萱)[867~936]은 금산사(金山寺)의 미륵이 자신이라 주장하였고, 태봉(泰封)의 궁예(弓裔)[?~918]도 자신을 미륵불의 현신이라 하였다. 근대의 신흥종교들도 대부분 미륵신앙에 근거하여 발흥하였다.

서동선화공주의 이야기는 신분을 초월한 사랑, 신화적 요소를 간직한 영웅, 미륵신앙 등이 중요 모티프로 작동하여 과거부터 현재까지 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끌고 있다.

[미륵사와 익산 천도설]

『삼국유사』의 서동선화공주의 이야기는 몇 가지 논란거리를 제시한다. 우선 백제 사람들은 서동선화공주의 이야기를 ‘무강(武康)의 이야기’라 전하는데, 일연은 ‘무강(武康)’을 ‘무왕(武王)’의 잘못된 표기로 확정한다. 무강과 무왕은 다른 존재일 수 있으며, 만약 그렇다면 서동선화공주 이야기는 무왕의 이야기가 아니게 된다. 두 번째, 서동선화공주가 창건한 절이 부여의 왕흥사(王興寺)일 수 있고, 익산의 미륵사일 수 있다. 일연은 『국사』에는 ‘왕흥사’라고 적혀 있다고 언급하지만, 자신은 이 ‘왕흥사’를 ‘미륵사’로 바꾸어 버린다. 왕흥사는 부여에 있고, 미륵사는 익산에 있다. 백제 익산 천도설은 서동선화공주가 창건한 절이 익산 미륵사라는 전제하에서 출발한다.

미륵사왕궁리의 궁터는 익산이 무왕 때 백제의 도읍이었다는 주장의 근거가 된다. 익산은 천도설부터 별도설, 별부설, 천도계획설, 별궁설 등 다양한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익산 도읍설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찾아볼 수 없어서 확정하기 어렵다. 고대 도성은 몇 가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우선 왕이 거주하는 왕궁이 있어야 하고, 국가 의례를 행하는 제례 시설, 불교 사찰, 도시 방어를 위한 나성과 산성, 왕권의 계통성을 보장하는 왕릉, 관청과 거주 시설 등이 갖추어져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익산은 몇 가지 요건을 충족한다. 우선 왕궁리 유적의 왕궁이 있고, 제례 시설로는 제석사지(帝釋寺址)와 신동리(信洞里) 유적이 있으며, 불교 사찰로는 미륵사지, 사자사지, 석불사지(石佛寺址), 오금사지(五金寺址) 등이 있다. 또한 산성들이 도성을 둘러싸고 있는데, 익산토성(益山土城)금마도토성(金馬都土城), 미륵산성(彌勒山城), 용화산성(龍華山城), 선인봉산성(仙人峰山城), 낭산산성(郎山山城) 등이다. 왕릉으로는 익산 쌍릉(益山雙陵)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유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대 도성 형태를 보여 주는 나성과 조방제 같은 시설이 발견되지 않아 익산 도읍설은 쉽게 인정되지 않는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한국 고대사 연구에 필수적인 사료이다. 그러나 기록이 과거의 모습에 사실성을 완벽히 보장하여 주는 것도 아니며, 기록이 없다고 하여서 과거의 사실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익산 도읍설을 뒷받침하기에 현재의 유적 수가 많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익산 왕궁리 유적미륵사 등 고대 유물에 대한 발굴 및 복원 사업을 체계적으로 진행한다면, 익산 도읍설을 뒷받침할 수 있는 충분한 자료를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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