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500021
한자 裡里近代-始作
영어공식명칭 Iri, The Beginning of Modernity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북도 익산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손시은

[정의]

일제 강점기 미곡 수탈을 위하여 지방 개발이란 미명하에 시작된 전라북도 익산 지역의 근대화 과정.

[개설]

개발과 척식이라는 미명하에 시작된 익산의 근대는 미곡을 중심으로 한 일제의 수탈과 착취의 역사를 생생하게 보여 준다. 일제 강점기 익산은 이른바 근대의 창(窓)과 같은 도시이다.

[미곡 수탈을 위해 계획된 근대]

일본에게 제1차 세계대전은 경제 호황을 불러왔다. 유럽의 공장이 전쟁의 잿더미로 변하는 동안, 일본에게는 오랜 경제 불황과 재정 위기를 타파할 절호의 기호가 찾아온 것이다. 기회를 놓칠 리 없는 일본은 공업화에 박차를 가하여 엄청난 재화를 생산하였고, 유럽 상품의 자리를 일본의 상품이 대신하면서 세계 무역의 판도가 바뀌었다. 일본의 해운업과 조선업이 공전의 호황을 누리며 일본을 세계적인 해운 강국으로 키운 것도 이때였다.

그러나 새옹지마라고, 전쟁은 유산계급인 자본가와 지주에게는 막대한 부를 가져다주었지만 빈부 격차에 따른 사회적 갈등과 모순이 첨예화하기 시작하였다.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공업화의 부작용으로 물가가 상승하였고 식량 가격도 폭등하였다. 당장 호구지책을 걱정해야 하는 소농들은 지주에게 자신의 토지를 팔고 소작농으로 전락하였고, 부채를 감당하지 못해 고향을 등지고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야반도주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전국적인 쌀 폭등 사태가 발생하자 일제는 식민지 한국에서 쌀을 증산하여 일본의 부족한 식량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익산은 호남평야의 중심에 위치하는 데다, 호남평야의 쌀을 일본으로 실어 나가는 군산항과도 20㎞ 남짓밖에 떨어지지 않아 일제의 산미증식(産米增殖) 계획을 실현하기에 최적의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이 호남평야를 기반으로 농업 경영을 시작하면서 양곡 수탈을 목적으로 철도 부설과 도로 건설이 전략적으로 이루어졌고, 그러한 기반 시설을 바탕으로 익산에 일본인 이주민들이 밀집하여 살면서 근대도시로의 발전이 이루어졌다. 이렇게 해서 개항과 식민 체제에 따라 미곡 수탈을 목적으로 급조된 도시 이리는 일제의 식민도시 개발의 길을 걷게 되었다.

[식민지 개발의 첨병, 토착왜구]

한국은 1945년 8월 15일 일제에게 빼앗겼던 국권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청산하지 못한 친일의 잔재가 곳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반면, 제2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는 나치 부역자를 철저하게 처벌하였다. 알베르 카뮈는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는 것은 내일의 범죄에 희망을 주는 것과 똑같이 어리석은 일”이라며 나치에 부역하였던 사람들을 숙청하는 데 앞장섰었다. 일제의 식민통치 동안 우리 민족이 받은 상처는 말로 형언하기 어렵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친일 청산 좌절의 결과가 어떤지는 '토착왜구'라는 말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 원래 토착왜구는 친일부역자라는 뜻으로, 1900년대 초 언론에 자주 등장하였던 토왜(土倭)에서 유래한 말이다. 사사로운 이익을 얻고자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한 고위관료층, 일제의 침략과 내정간섭을 지지하고 선동한 정치인과 언론인, 의병을 진압하고 학살하며 일본과의 합병을 주장하였던 일진회 등 친일단체 회원 등이 대표적인 토왜이다.

전형적인 식민도시로서 익산의 근대화는 경술국치 직후부터 군산항을 배후에 둔 내륙 철도도시 익산의 등장 시기와 맞물린다. 우리는 익산의 도시 개발이 식민지 민중의 요구가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일제는 토왜 친일파들을 요직에 앉혀 개발 사업을 추진하게 하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을 폈다. 예컨대 대표적인 친일파인 박기순과 그의 아들 박영철에게 이리 신도시를 정비하고 도로와 철도 주변으로 시가지를 개발하는 임무를 부여하였다. 도시 개발 과정에서 한국인에게 토지를 침탈·매수한 뒤 그 토지에 일본인들을 집단적으로 이주시켜 농장을 경영하며 한국인을 소작농으로 부리게 하였다. 익산 일대에 일본인 농장이 많이 들어서 있던 것도 지방 개발을 신속하게 할 수 있었던 요인이었다. 1904년 이전에 이미 대장촌, 임피, 김제, 황등, 옥구 등에 대규모 일본인 농장이 만들어졌다.

일본인 자본가들은 제일 먼저 한국 최대의 곡창지대인 호남평야에 눈독을 들였다. 전라북도 총 면적의 3할이 넘는 호남평야는 굶주린 일제에게 더할 나위 없는 먹잇감이었다. 더군다나 호남평야는 너무나 넓은 탓에 작은 만경강과 동진강의 하천만으로 전 지역을 관개할 수 없어 이미 삼국시대부터 관개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삼호(三湖)'로 알려진 김제의 벽골제, 정읍의 눌제, 익산의 황등제(黃登堤)가 그것이다. 일명 '거북다리' 또는 '요교호(腰橋湖)'라고도 불렸던 황등제는 제방의 길이가 1㎞, 호수의 둘레가 약 10㎞에 달하는 우리나라 제일의 담수호였다고 한다. 황등제의 어마어마한 규모를 상상해 봤을 때 황등제를 기준으로 호서와 호남으로 나뉘었다는 말도 이해가 간다. 그러나 일제의 산미증산 계획에 의해 1935년 완주군에 경천저수지가 신설되고, 황등제는 논으로 개간되어 버리는 바람에 지금은 그 자취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이러한 일제의 식민정책 앞에서 사리사욕을 위해 민족을 저버린 토왜 친일파의 극악스러움이 있었다.

일제의 미곡 수탈 거점도시 익산 건설은 일본인들의 대규모 이주와 그들이 설립한 이민촌을 통해 일찍부터 시작되었다. 일본인 이민자들은 지방 개발을 통한 근대화·문명화의 명분을 들이대며 다양한 지역 공공단체 및 사회단체를 우후죽순으로 설립하였다. 이리 신시가지 형성 과정은 일본인 이민자 사회의 정착 과정이자 팽창 과정이기도 하였다. 1915년 당시 이리 신시가지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수는 1,893명, 조선인은 348명이었다고 한다. 한국인의 다섯 배가 넘는 일본인이 살았으니 정말로 일본 땅과 다름없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각종 관변단체가 난립하였다. 이러한 관변단체에는 친일파들이 참여하여 일제의 철도 부설과 도로 건설을 위한 부지를 강제로 빼앗거나 자금을 댔고, 학교조합을 비롯한 익산의 공공단체를 동원하여 일제 식민권력과 협력하며 개발에 대한 정당성과 이권을 확보하고자 폐쇄적인 네크워크를 형성하였다. 이는 수리조합이나 금융조합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관변단체의 속성과 동일하였다. 말 그대로 토착왜구였던 것이다.

[도로 건설과 철도 부설로 본격화된 근대화]

남일면 솜리를 중심으로 형성된 한적한 농촌 지역이었던 익산은 전군도로 건설과 호남선 철도 부설을 계기로 근대 신흥도시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익산의 근대는 철도와 도로라는 교통 인프라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근대 이전의 익산 지방은 산지나 구릉 지대에 기대어 마을이 발달한 전형적인 농촌 지역이었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 드넓은 호남평야의 미곡에 눈독을 들인 일본인들이 대거 익산, 삼례, 김제 등지에 이주하여 농장을 경영하기 시작하였다. 일제는 근대적 토지 소유 제도를 확립한다는 구실로 대대적인 토지조사 사업을 벌여 우리 농민들이 피땀으로 일군 토지를 강제로 빼앗고, 그 땅을 일본인 지주나 친일파에게 무상으로 불하하거나 헐값으로 되팔았다. 토지를 빼앗긴 농민들은 생계를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원래 자기의 땅에서 소작인이 되어야 하였다. 일제 강점의 식민지 현실에서 영세 소작농으로 전락한 수백만 명의 농민들은 터무니없이 비싼 소작료를 감당하지 못하여 화전민으로 전락하거나 간도와 만주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이러한 토지 정책의 결과로 등장한 일본인 대지주들을 중심으로 근대적 농업경영이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인 농장은 이리 일대보다는 구이리, 오산면 일대, 대장촌, 황등과 함열 등 농경지가 넓게 발달한 교외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근대적 농업 경영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옥구 지역과 익산 지역 일대에 일본인들의 농장이 밀집하고 농업 생산성이 증대됨에 따라 1908년부터 설립된 각종 수리조합은 근대적 농업 경영의 발달과 생산량 급증을 이끌었다. 일제는 늘어난 농업 생산물을 조선 전역에 유통시키는 한편 조선의 원료와 식량을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하여 서둘러서 도로와 철도를 건설하였고, 이러한 사회간접자본을 기반으로 익산의 산업 잠재력은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1908년 10월 개통된 전군도로는 일제가 호남평야의 쌀을 일본으로 반출할 목적으로 전주와 군산 간에 건설한 도로이다. 신작로, 즉 우리나라 최초의 포장도로인 전군도로는 폭이 7m, 길이가 46㎞에 달하였다. 호남평야를 관통해서 쭉 뻗은 전군도로에는 전주, 익산, 김제 등에서 생산된 미곡을 일본으로 수탈해 가기 위하여 군산항으로 실어 나르는 트럭들과 달구지가 수십 리씩 행렬을 이루었다고 한다.

익산의 본격적인 근대화는 일본 제국주의가 1910년 강제 합방으로 철도부설권을 독점한 후 추진한 ‘호남선 철도부설 사업’의 일환으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12년 개통된 호남선은 1924년에는 목포까지 이어졌는데, 철도 건설이 근대 사회에 미친 영향은 여러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익산의 경우 철도 부설은 근대 일상생활 문화의 변화와 소비도시화 촉진, 이동 장벽 제거에서 나타난 새로운 일거리 창출, 교통 편리성과 거주 안정성 확보를 통한 일본인들의 이주 촉진 등으로 근대도시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철도가 개통함에 따라 이리역을 중심으로 일본인의 이주가 급증하였고 상가와 주거지가 형성되어 갔다. 일본인들은 일제 강점의 정치적 상황을 이용하여 우월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당시 이리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이리역 앞 주요 간선도로를 중심으로 형성된 시가지에는 금융 기관을 비롯해 조면, 정미, 양조 등 농산물 정제·가공 시설과 도매형 유통 상점이 급증하였다. 시가화의 주요 지표가 되는 상점과 공장의 수가 철도 부설 이후 두 배 가까이 늘었고, 인구가 집산하면서 이리역 앞 신시가지를 중심으로 여관, 음식점, 병원, 약국, 극장 등 근린생활시설이 집중되었다. 철도 부설과 역사 건립은 이리역 앞 시가지를 소비문화 공간으로 만드는 데 작용하였다. 영정(榮町)과 일지출정(日之出町)을 중심으로 삼남극장, 시공관, 이리극장 등이 들어섰으며, 역 앞으로 도박장, 유곽, 기생집 등 유흥 공간이 들어서 근대 도회의 일상적 공간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1914년 4월에 개설된 이리시장[구시장, 현 남부시장]과 1947년 4월 1일에 개설된 중앙시장은 이리 지방의 농산물 가공, 유통산업 등이 철도역과 어우러져 배태한 근대적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익산 일대의 도로 건설과 철도 부설은 익산 전체의 공간구조 및 이리의 도시화와 도시공간구조의 변화를 가져왔다. 호남선전라선 철도가 부설됨에 따라 이리역을 중심으로 T자형 간선도로와 구획도로들이 확충되면서 격자형 도시 평면이 구축되었다. 이리 시가지의 도로체계가 변화되면서 영정통을 따라 남북 방향으로, 그리고 행정(幸町)·일지출정을 중심으로 동서 방향으로 시가화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이리역과 연결되는 일지출정은 익산군청과 이리읍사무소를 비롯하여 동양척식회사, 삼남은행 등의 업무 시설과 관공서 근무자 및 이용자를 대상으로 하는 여관과 요식업이 집중되어 있었던 데 비해 영정통은 각종 상가를 중심으로 시가지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리역 앞 신시가지의 중앙 도로변에는 일본인 지주·상인·기업가들이 몰려들어 독점적인 일본인 거주 시설을 이루었고, 이리시장을 중심으로 한 구이리역 부근은 조선인의 거주와 상업 활동이 이루어지면서 조선인과 일본인의 생활권이 공간적으로 분리된 이중구조가 나타났다. 영정과 행정, 일지출정을 중심으로 한 이리역 동쪽 편 일대의 중심지화와 구이리역 방향으로의 시가지 확대는 해방 후 1970년대 경제성장기에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그 후, 이리역폭발사고를 계기로 현대식 상가가 늘어선 새로운 중심지, 중앙동거리로 재탄생하였다.

[익산의 탈근대]

1977년 11월 11일 밤 9시 15분, 화약을 싣고 인천을 출발하여 광주로 가던 한국화약주식회사의 열차가 이리역에서 대기하던 중에 폭발하였다. “쾅” 하는 폭발음과 함께 도시는 아비규환의 생지옥으로 변하였다. 역 구내에 있던 객차, 화물열차, 기관차 등 30여 량이 파손되었고 철로는 엿가락처럼 휘었다. 이리역폭발사고 직후 박정희 정부는 민심의 소요를 막기 위하여 중앙재해대책본부를 구성하고 적극적으로 재해 복구 활동에 나서서 ‘새 이리 건설사업’을 추진하였다. 이리역폭발사고를 계기로 이루어진 ‘이리 재건 사업’과 ‘새 이리 건설사업’은 익산역 일대를 중심으로 익산 시가지가 확장·개편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리역폭발사고 로 인한 시가지 재정비사업에 의해 호남의 근대 거점 도시로서 익산의 흔적은 대부분 사라졌다. 아파트가 들어섰고, 창인동모현동의 역 주변 판잣집들이 깨끗이 정리되었다. 이리와 대전 간의 호남선 복선화 작업도 완공되어 1978년 3월에 개통되었으며, 11월에는 900평의 신(新) 역사도 준공되었다. 익산역은 2015년 KTX호남선 개통, 2016년 SRT 개통에 이어 최근에는 유라시아 대륙철도 거점역이라는 로드맵을 그리고 있다.

2019년 3월 26일, 익산근대역사관이 개관하였다. 익산근대역사관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였던 김병수가 1922년 익산시에서 처음으로 개원하였던 익산 중앙동 구 삼산의원(益山中央洞舊三山醫院)[국가등록문화재 제180호]을 활용해 만든 곳으로, 익산의 100여 년에 걸친 근대 역사와 문화유산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공간이다. 익산근대역사관 1층 상설전시실에서는 근대 이리의 모습, 근대 농업을 선도한 이리의 농장들, 익산 지역 항일운동, 해방 후 이리의 변천사 등을 살펴볼 수 있다. 2층에는 이리의 산업단지와 민주화운동, 도농 복합도시로서 익산의 근대에서 현대까지를 이야기와 사진 자료 등으로 만날 수 있다. 폭발의 화염에 삼켜진 익산의 근대는 이제 역사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익산의 근대는 일제의 식민지 수탈의 참상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창이다. 아프고 슬픈, 그럼에도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그 창 너머 생생한 모습들을 익산근대역사관에서 만나보기 바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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