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미륵사지 서탑 출토 금제사리봉영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500599
한자 益山彌勒寺址西塔出土金製舍利奉迎記
영어공식명칭 The Record about Sarira on a Plate of Stone Pagoda of Mireuksa Temple Site, Iksan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문헌/문서
지역 전라북도 익산시
시대 고대/삼국 시대,현대/현대
집필자 이다운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작성 시기/일시 639년연표보기 - 익산 미륵사지 서탑 출토 금제사리봉영기 작성
관련 사항 시기/일시 2009년 1월 14일 - 익산 미륵사지 서탑에서 금제사리봉영기 포함한 사리장엄구 발굴
문화재 지정 일시 2018년 6월 27일 - 익산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장엄구 보물 제1991호 지정
소장처 국립익산박물관 -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미륵사지로 362[기양리 104-1]지도보기
발견|발굴처 익산 미륵사지 -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32-2 지도보기
성격 문서
관련 인물 무왕|사택적덕의 딸
용도 사리봉안기
문화재 지정 번호 보물[익산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장엄구]

[정의]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미륵사지 서탑에서 발견된 사리봉영기.

[개설]

사리봉영기는 사리를 모시는 내력을 적은 글로, 사리 공양을 위하여 석탑을 조성하는 과정이나 사찰의 창건 배경을 기록하기도 한다. ‘사리봉안기’라는 명칭도 함께 사용되고 있다.

익산 미륵사지 서탑 출토 금제사리봉영기미륵사지 서탑을 해체하던 중 2009년 1월 14일 1층 첫 번째 심주석(心柱石) 윗면 중앙에 설치된 사리공 및 기단부에서 사리장엄이 발견되었다. 가로 25㎝, 세로 25㎝, 깊이 27㎝의 사리공에는 맨 밑바닥에 유리판을 깔고 그 위에 공양품을 차례대로 안치하였는데, 금제사리봉영기는 최상위층 남측 벽면에 기대어 놓은 상태로 확인되었다. 이 금제사리봉영기는 백제 무왕의 왕후가 재물을 내놓아 미륵사를 창건하고,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고자 639년에 해당하는 기해년(己亥年)에 사리를 봉안하고 탑을 세웠다는 내용의 발원문이다. 발원자, 건립 배경, 건립 시기를 정확히 밝힌 중요한 자료이다.

2018년 6월 27일 익산 미륵사지 서탑 출토 금제사리봉영기를 포함한 익산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장엄구 총 아홉 점이 보물 제1991호로 지정되었다.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에 있는 국립익산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형태]

얇은 금판으로 제작한 사리봉영기는 사리공 최상위층에서 가로 15.3㎝, 세로 10.3㎝, 두께 0.13㎝ 크기의 완형(椀形)[사발 모양]으로 발견되었다. 글씨는 선명하게 잘 드러나도록 붉은색[朱砂]으로 칠하였고, 앞면은 11줄에 99자, 뒷면은 11줄에 94자, 총 193자를 오목새김하였다. 그러나 사리공 안의 환경이 무척 습하여 칠이 많이 벗겨졌다. 벗겨진 칠의 일부는 금동제사리외호 옆면에 부착되었고, 뒷면의 칠은 아래로 흘러내려 바닥 유리판에까지 묻어 있었다.

[구성/내용]

문장은 부여 사택지적비(沙宅智積碑)에서도 사용한 중국 육조 시대의 사륙병려체(四六騈儷體)로 구성하였다. 그 내용은 김상현의 2009년 논문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법왕(法王)께서 세상에 출현하시어 근기(根機)에 따라 부감(赴感)하시고, 중생에 응하여 몸을 드러내신 것은 마치 물 가운데 비치는 달과 같았다. 이 때문에 왕궁에 의탁해 태어나 사라쌍수(娑羅雙樹) 아래에서 열반에 드셨는데, 8곡(斛)의 사리를 남겨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를 이익 되게 하셨다. 마침내 찬란히 빛나는 오색(五色)[사리]으로 일곱 번을 돌게 하였으니, 그 신통 변화는 불가사의하였다.

우리 백제 왕후는 좌평(佐平)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로서 오랜 세월 동안 선인(善因)을 심으시어 금생에 뛰어난 과보[승보(勝報)]를 받으셨다. [왕후께서는] 만민을 어루만져 기르시고 삼보(三寶)의 동량(棟梁)이 되셨다. 때문에 삼가 깨끗한 재물을 희사하여 가람(伽藍)을 세우고, 기해년 정월 29일에 사리를 받들어 맞이하셨다.

원하옵건대, 세세토록 공양하여 영원토록 다함이 없어서 이 선근(善根)으로 우러러 대왕 폐하의 수명은 산악과 나란히 견고하고, 왕위는 천지와 함께 영구하여, 위로는 정법(正法)을 크게 하고 아래로는 창생(蒼生)을 교화하는 데 도움이 되게 하소서.

다시 원하옵건대, 왕후의 몸에 나아가서는, 마음은 수경(水鏡) 같아서 법계(法界)를 항상 밝게 비추시고, 몸은 금강과 같아서 허공과 같이 불멸하시어, 칠세(七世)를 영원토록 다함께 복리(福利)를 받고, 모든 중생들이 다함께 불도를 이루게 하소서.”

[의의와 평가]

사리봉영기 발견을 통해 미륵사의 건립 목적과 발원자, 그리고 639년이라는 서탑의 건립 연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639년이라는 절대 연대는 함께 출토한 다양한 사리장엄구와 관련 유적·유물을 연대순으로 정리하는 데에 하나의 기준이 되므로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 그리고 백제 무왕의 부인이 『삼국유사(三國遺事)』가 전하는 선화공주가 아닌 백제 귀족 사택적덕의 딸이라는 새로운 사실을 전하고 있어 앞으로 이에 대한 연구가 주목된다. 좌평은 백제 16관등 중에서 가장 높은 제1품이며, 사택씨는 백제의 대표적 귀족가문 8개 성씨를 일컫는 대성팔족(大姓八族) 중에서도 가장 먼저 언급될 정도의 힘 있는 가문이다. 사리봉영기의 발견을 계기로 미륵사 창건 주체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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