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대학교 이리분교 이전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501106
한자 中央大學校裡里分校
영어공식명칭 Chungang University, Iri branch school
분야 문화·교육/교육
유형 기관 단체/학교
지역 전라북도 이리시[현 익산시] 창인동1가 145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혜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교 시기/일시 1951년 10월 31일 - 중앙대학교 이리분교 설치
폐교 시기/일시 1961년 5월 16일연표보기 이후 - 중앙대학교 이리분교 폐교
최초 설립지 중앙대학교 이리분교 - 전라북도 이리시[현 익산시] 창인동 145
성격 사립대학교 분교

[정의]

전라북도 익산시 창인동에 있었던 중앙대학교의 분교.

[교육 목표(교훈 포함)]

중앙대학교의 교육 이념은 ‘의에 죽고 참에 살자’이다.

[변천]

중앙대학교는 교육을 통하여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킬 목적으로 1918년 4월 설립한 중앙유치원이 모태이다. 이후 교사 양성기관인 유치사범과를 설치하였고 1922년에는 중앙보육학교로 승격하였다. 이후 1948년 5월 중앙대학으로, 1953년 2월 4년제 대학교로 승격하여 중앙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6·25전쟁 으로 정부가 부산으로 피난을 가자 중앙대학교는 1951년 부산에 임시 캠퍼스를 마련하고 강의를 계속하였다. 이때 호남지방의 지역 유지들과 중앙대학교 학생들이 전주에 분교를 설치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전주보다는 이리시[현 익산시]가 교통 사정 등 여러 조건이 맞아 이리에 분교 설치를 결정하였다. 그러나 개교 예정일인 같은 해 10월 13일까지 적당한 교사를 마련하지 못하여 입학식을 갖지 못하자 중앙대학교는 분교 설치를 중지하려고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지역 유지들과 호남지방 중앙대학교 학생들이 분교 설치의 필요성을 거듭 강조하여 마침내 1951년 10월 31일 이리농과대학의 강당을 빌려 개강하였다.

이후 1951년 11월에 이리 귀속농지 관리국의 창고[창인동 145번지]를 빌려 교사로 사용하였는데 개강할 무렵 201명이었던 학생 수는 1년 후인 1952년 12월에는 656명[남자 622명, 여자 34명]으로 증가하였다. 이리분교에는 중앙대학교 학생만이 아니라 피난 중인 서울대학교, 고려대학교, 연희대학교[현 연세대학교] 등 여러 대학의 학생들이 수강하였다. 6·25전쟁이 끝난 뒤인 1953년 서울로 복귀한 중앙대학교는 이리분교 폐지 방침을 세웠다. 그러나 전라북도 사회 유지들의 노력으로 존치되어 오다가 1961년 5·16군사정변 이후 대학 정비 정책에 따라 이리분교 학생들은 중앙대학교 서울캠퍼스로 합류하고 이리분교는 폐쇄되었다.

[교가와 상징물]

중앙대학교의 교가[김태오 작사, 나운영 작곡]는 다음과 같다.

남산이 영을 넘어 바라보이고/ 뒤로는 관악산이 높이 솟았네/ 한강수 굽이치는 노들의 강변/ 명수대 송림 속에 우뚝 선 중앙/ 의에 죽고 참에 삶이 모교의 정신/ 세계에 빛내세 우리 중앙대학교

중앙대학교의 교목은 느릅나무이고, 상징물은 청룡상이다.

[참고문헌]
  • 『익산시사』(익산시사편찬위원회, 2001)
  • 중앙대학교 100주년 기념사업단(http://100.ca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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