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300021
한자 開港期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거창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하지영

[정의]

1876년부터 1910년까지의 시기 경상남도 거창군 지역의 역사.

[개항과 거창]

조선은 1876년 2월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문호를 개방하였다. 이에 따라 부산, 원산, 인천이 차례로 개항되었고 내륙의 주요 도시에는 개시장이 설치되었는데, 이들 개항장과 개시장을 중심으로 근대의 신문물이 물밀듯이 들어왔다. 정부는 개항 이후 부국강병을 목표로 적극적인 개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은 외세의 침략을 수반하고 있어 많은 백성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경상남도 거창군은 지리적으로 서부 경상남도의 내륙에 위치한 탓에 새로운 문물의 도입이 개항장이나 개시장과 같은 주변의 도시에 비해 지체되었다. 거창의 변화는 1894년부터 본격화되었다. 이 해는 청일 전쟁, 1894년 농민 전쟁, 갑오개혁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고, 이듬해에는 행정 구역이 변경되었다. 1895년 지방 관제 개정으로 전국의 8도가 23부로 바뀌었다. 이에 조선 영조 대에 종삼품 부사가 다스리는 도호부가 되었던 ‘거창부’는 거창군이 되어 진주부에 소속되었다. 이로써 거창은 서북부 경상남도의 중심 도시가 되었다. 이때 위천 지역은 안의군에 통합되어 진주부에 소속되었다. 1년 후인 1896년 23부가 폐지되고 전국에 13도가 설치되었다. 경상도는 경상남도와 경상북도로 분리되었고 거창군과 안의군, 삼가군은 모두 경상남도에 소속되었다.

[거창의 근대적 변화]

조선 시대 거창읍에는 천내면[지금의 거창읍 상림리 일대]의 읍치 중심에 객사가 있고 그 오른쪽 앞에 거창도호부의 아사(衙舍)가 배치되어 있었다. 이 시설을 중심으로 도로망이 구축되었는데, 객사와 관아에서 영천(瀯川) 하천가로 이르는 대로변[지금의 아림로]과 영천 변의 모래섬에는 5일마다 장이 서는 시장이 형성되었다. 거창 5일장은 합천, 함양, 산청 등의 장꾼들이 문전성시를 이루어 경상남도 서북부 지역에서도 가장 중심이 되는 장터였다. 이 시기 거창의 도로는 전반적으로 임시 건물[假家]에 의해 협소하였고 정비도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였으며 주요 관공서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초가 건물이었다. 하지만 개항 이후 새로운 문물이 들어오면서 거창도 차츰 근대 도시로서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이는 도시의 외관뿐만 아니라 지역민들의 일상까지 조금씩 바꾸어 나갔다. 1908년 무렵 거창군은 약 1,000여 호에 5,000여 명의 인구가 사는 다소 큰 부락이었다. 내륙에 위치한 탓에 개항장처럼 많은 일본인들이 거주하지는 않았지만 1908년 무렵 24호에 57명이던 일본인은 1910년대 초에는 약 100여 명으로 늘어나는 등 그 수는 차츰 증가하였다. 이들의 진출과 함께 경찰서, 우편 취급소, 재무서, 재판소 등의 통치 기관을 비롯하여 학교, 상점 등 근대적인 시설들이 만들어졌다. 일제는 거창에 경찰서를 설치하여 1894년 순교라고 불리는 경찰을 파견하고 1906년과 1907년에는 경찰 확장 계획에 따라 경찰력을 대폭 강화하였다. 1905년 설치된 거창 우편국 취급소는 통감부의 지역 통치 및 세금 징수에 이용되기도 하였으나 지역민에게도 적지 않은 편의를 제공해 주었다. 1907년 거창 소학교를 비롯하여 군립 일어 학교, 사립 원명 학교 등이 개교하면서 근대식 교육을 받을 수 있는 배움의 장이 마련되었다. 1910년 일제의 사법 제도가 정비되기 전인 1909년에는 객사 자리에 재판소가 설치되어 일본인 검사와 판사가 임명되었는데, 이는 진주 지방 재판소 거창 재판소로 설치되었다가 1912년 부산 지방 법원 거창 지청으로 개칭되었다. 한편 시장에는 일본인들이 본국 등으로부터 들여온 물건들을 파는 상점을 개점하여 지역민들에게 판매하였다.

[거창 지역의 반외세 투쟁]

거창의 지역민들은 개항 이후 진행된 거창의 근대적 변화에 적응하는 한편 그에 수반된 일제의 침략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맞서며 강하게 저항하였다. 1894년 농민 전쟁 당시 안의와 가조 등지에서 관군 및 일본군을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벌이며 반봉건 반외세 기치를 높였던 거창의 지역민들은 특히 을사늑약 이후 주권이 상실되고 일제에 의해 한일 합병이 추진되자 애국 계몽 운동과 의병 전쟁을 벌이며 일제의 침략에 최후까지 저항하였다. 우선 1906년 서울에서 나철오기호 등이 오적 암살단을 조직하여 을사오적을 사살할 계획을 세우자 거창읍 구례 마을 출신의 윤충하는 이들과 함께하면서 직접 처단에 나섰다. 1907년에는 일제에게 진 빚을 갚고 경제 자립을 이루고자 한 국채 보상 운동, 교육을 통하여 민족 의식을 고취시키고 국망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한 애국 계몽 운동이 일어났다. 거창 지역민들은 이에 적극 동참하였다. 거창군 웅양면 산포리 부인 17명이 19원 80전을 보내는 등 모금 운동에 동참하였고 이병태는 서북 학회의 회보인 『서우』에 논설을 게재하여 서양 학문을 익혀 주권을 지킬 것을 주장하였다. 1907년 향교가 거창 소학교로 개편되자 거창 지역민들은 자녀를 진학시켜 신학문을 습득케 하는 데 열의를 보였다. 한편 1895년 명성 황후 시해와 단발령 실시를 계기로 전국의 유생과 농민들은 이에 반대하며 의병을 일으켰다. 거창 지역에서는 고제면 출신으로 안의에서 성장한 노응규가 을미 의병을 일으킨 것을 비롯하여 1905년 이후에는 월성 의병, 오 진사 의병, 이 진사 의병 등 거창의 지역 의병들이 활발한 의병 투쟁을 전개하였고 김동신, 문태수덕유산을 근거지로 한 의병들이 거창 각지에서 일본 군경을 상대로 크고 작은 전투를 치루는 등 후기 의병의 주요한 활동 무대가 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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