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300137
한자 月星 義兵
영어공식명칭 Justice Army of Wolseong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월성리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하지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06년연표보기 - 월성 의병 월성 서당에서 결성
최초 설립지 월성 서당 - 경상남도 안의군 북상면 월성리
현 소재지 월성 서당 터 -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월성리 지도보기
성격 항일 의병
설립자 오일선|김성진|김현수|하거명|박화기 등 40여 명

[정의]

을사늑약 체결 후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월성리를 근거지로 활약한 항일 의병.

[개설]

을사늑약 체결 후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월성리에서 조직되어 덕유산 의병과 함께 일본군 및 관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거창의 대표적인 지역 의병이다.

[설립 목적]

을사늑약 체결 후 이에 반대하는 의병 투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무렵인 1906년 거창군 북상면 월성리에서 오일선(吳馹善)을 중심으로 김성진(金成鎭), 김현수(金顯壽), 하거명(河巨明), 박화기(朴華箕) 등 40여 명이 월성 서당에 모여 일제의 국권 침탈에 저항하여 이를 물리치고자 의병 봉기를 결의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1906년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월성리에서 결성된 월성 의병은 도총, 유격, 후군, 군수, 정보 등의 부서로 편제되었다. 의병 본부인 도총부는 김현일의 사랑채에 설치되었다. 유격 대장은 하거명, 부대장은 박화기가 맡았다. 유격대는 10여 명의 부대로 편성되어 산속에 막사를 짓고 본부와 연락을 취하면서 작전을 수행했는데, 그 암호는 베 짜는 북을 가는 소리로 하였다. 또한 노변에 표식을 비치하거나 철거하여 행동을 신속 민활하게 하면서 각지에 출몰하여 적의 허점을 습격하는 유격 전법으로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후군장 김성진은 의병들에게 무술을 가르치는 한편 전방과 호응하여 활동하였다. 군수감은 김현수가 맡았는데, 군수 부대원들은 군량과 묵, 탄약 등을 수집, 제조, 조달하였다. 정보 수집을 맡은 감찰 이석길은 마을 앞에 주점을 차려 놓고 대원들로 하여금 왕래하는 사람들을 살피며 정보를 수집하게 하였다.

월성 의병이 활동을 시작했을 무렵 많은 의병들이 덕유산으로 이동해 왔다. 1906년 월성 의병안의군 출신으로 무주 덕유산에 근거지를 두고서 활동하고 있던 문태수의 호서 의병과 제휴하여 싸웠다. 또한 전국 각지에서 덕유산으로 모여든 의병장 200여 명에게 군수 물자를 보급하였다.

1906년 9월에는 호서 의병과 연합하여 장수 싸움에서 적 10여 명을 몰살하였고 무주 고창골 전투에서도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1907년 이후 월성 의병덕유산 의병과 함께 일본군 및 관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읍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는데, 10월 8일에는 의병 300여 명이 월성에서 일본 포병과 2시간가량 교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1908년 5월 27일 덕유산 의병과 함께 무주 구천동 백련암에서 안의 수비대와 교전을 벌여 적 200여 명을 포위하여 살상하는 전과를 올렸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하거명과 김권원이 전사하였고, 1908년 10월에는 박화기, 박수기, 유춘일 등 중추 세력이 전사하면서 기세가 크게 꺾였다. 그러한 와중에도 그해 9월 무주 덕유산 삿갓골에서는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 일곱 명의 적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1910년 이후 의병들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서울과 진주, 전주에서 옥고를 치루었다.

[현황]

당시의 월성 서당 일대는 현재 캠핑장으로 변모했으나 후대에 세운 정자와 월성 의거를 기념하는 사적비가 현장을 지키고 있다. 현충 시설로 지정된 월성 의거 사적비는 1971년 5월 15일 월성 의거 추모회에서 월성 의병 48인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것으로, 거창군에서는 매년 3·1절 유족, 추모 회원, 면민 등이 참석한 가운데 추모식을 열어 월성 의병의 애국 충절과 항일 운동 정신을 기리고 있다.

[의의와 평가]

의병 운동사에서 을사조약 이후의 후기 의병 운동은 충청남도 출신의 김동신이 호남의 명망 유생 고광순과 함께 지리산을 근거지로 삼아 봉기함으로써 촉발되었다. 김동신이 봉기하자 안의, 거창, 함양, 진주 등지의 지역 의병 세력이 힘을 모아 의병 투쟁에 참여하였다. 이로써 지리산을 중심으로 하는 경상남도 서부 지역의 의병 운동이 활성화되었다고 볼 때, 거창의 월성 의병은 군대 해산 이후 활성화되는 후기 의병 운동의 한 진원지였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큰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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