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3004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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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石谷集 |
영어공식명칭 | Seokgokjip|A Collection of Seokgok's Works |
이칭/별칭 | 석곡 문집(石谷 文集)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
시대 |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태성 |
저술 시기/일시 | 1540년~1594년 - 『석곡집』 성팽년이 저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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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 시기/일시 | 1804년 - 『석곡집』 구연 서원에서 간행 |
소장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도서관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운중동 490-8 |
소장처 | 국립중앙도서관 -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동 산60-1 |
간행처 | 구연 서원 -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대정리 |
성격 | 문집 |
저자 | 성팽년(成彭年) |
간행자 | 구연 서원(龜淵 書院) |
권책 | 2권 2책 |
행자 | 10행 20자 |
규격 | 29.6×9.5㎝|반곽(半郭) 23.0×5.6㎝ |
어미 | 상 이엽 화문 어미(上二葉花紋魚尾) |
권수제 | 석곡집(石谷集) |
판심제 | 석곡문집(石谷文集) |
[정의]
1804년에 간행된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출신의 조선 후기 학자이자 의병장인 성팽년의 문집.
[저자]
성팽년(成彭年)[1540~1594]은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이옹(頤翁), 호는 석곡(石谷)이다. 아버지는 교위(校尉) 성한량(成漢良)이다.
1564년(명종 19)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유생으로 있었다. 1569년(선조 2) 아버지의 상 이후 관직에 대한 뜻을 버리고 오직 어머니에게 효성을 다하였다. 효행으로 천거받아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면(金沔)이 거창 일대의 경상도 북서부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정유명(鄭惟明) 등과 함께 기병 유사(起兵有司)로 창의문(倡義文)을 발통하는 등 김면의 참모가 되어 의병 활동을 하였다. 시문과 글씨에 모두 뛰어났고, 의약·복서(卜筮)·산경(山經)·지지(地誌) 등 유학 이외의 다양한 분야도 두루 섭렵하였다. 세상을 떠난 후 지평(持平)에 추증되었고,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의 구연사(龜淵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2권 2책의 『석곡집(石谷集)』이 있다.
[편찬/간행 경위]
『석곡집』은 1804년(순조 4)에 구연 서원(龜淵 書院)에서 간행하였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에 있으며, 규장각 도서에는 권2의 1책만 전한다.
[형태/서지]
『석곡집』은 2권 2책이며, 크기는 29.6×9.5㎝, 반곽(半郭)[글이 담긴 테두리 안쪽 면]은 23.0×5.6㎝이다. 사주 단변(四周單邊)[지면의 네 둘레를 하나의 선으로 돌림]에 어미는 상 이엽 화문 어미(上二葉花紋魚尾)[위쪽에 화문이 있는 물고기 꼬리 모양의 검은 어미가 있는 형태]이다. 권수제는 ‘석곡집(石谷集)’이며, 판심제는 ‘석곡문집(石谷文集)’이다.
[구성/내용]
『석곡집』은 권두에 이의조(李宜朝)의 서문, 권말에 윤수정(尹守正)의 발문이 있다. 권두에 세계(世系)가 실려 있으며, 권 1에 시 119수·소(疏) 1편·서(書) 1편이 있다. 권 2에는 부(賦) 2편, 서 2편, 상량문 1편, 책(策) 1편, 제문 3편, 창의문(倡義文) 1편이 실려 있으며, 부록으로 「석곡 선생전(石谷先生傳)」 1편, 행장 4편, 묘갈명 1편, 그리고 성팽년이 봉안된 구연 서원의 고유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대개 경전(經傳)과 사서의 내용을 읊은 것들이다.
시고(詩稿) 끝에 수록된 「경상감사 김수병 사조대곤청참소(慶尙監司金睟兵使曺大坤請斬疏)」는 임진왜란 때 올린 소이다. 경상도가 왜구에게 허무하게 무너진 배경 및 감사와 병사가 살기에 급급해 도망다니면서도 의병 활동이 관군에 방해된다는 명목으로 제어하려 했던 실상을 상세히 기술하였다.
서(書)의 「상체찰사서(上體察使書)」는 당시 체찰사인 유성룡(柳成龍)에게 호남이 나라의 마지막 보루임을 누누이 강조한 것이다. 「창의문」은 당시 초유사 김성일(金誠一)의 격문에 부응하여 궐기한 성팽년의 의병 일기이다. 당시 왜군에 대처한 전략과 경상도 서부 지역 의병의 상황을 자세히 적고 있다. 또 「상유감사홍서(上兪監司泓書)」는 수리 시설의 중요성을 지적한 편지다. 성팽년이 사는 안음(安陰) 지방의 북쪽 황산평은 종자만도 100여 석이나 드는 넓은 평야인데도 가뭄이 들면 하나도 수확하지 못하여 주민들이 저수지를 막기로 하였으니 관가에서 인근 주민들을 동원해 줄 것을 청한 것이다. 이 밖에 오덕홍(吳德弘)이 기술한 「석곡 행장」 가운데 제사는 반드시 성팽년 자신이 준비하여 세속에서처럼 누이 집에서 돌려가며 차리게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적고 있다. 그때까지도 제사는 아들딸 구별 없이 돌아가며 모셨음을 알 수 있는 자료다.
[의의와 평가]
『석곡집』은 임진왜란 당시 경상도 서부 지역의 의병들의 활동과 관군과의 갈등 등을 자세히 살필 수 있고 또 당시 거창 지역의 수리 시설과 풍속 등에 대한 것도 알 수 있는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