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3004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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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愼菴遺稿 |
영어공식명칭 | Sinam Yugo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경상남도 거창군 고제면 괘암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
집필자 | 이정희 |
저술 시기/일시 | 1861년~1907년 - 『신암유고』 노응규가 저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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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 시기/일시 | 1993년 - 『신암유고』 노성용이 간행 |
소장처 | 경상대학교 도서관 - 경상남도 진주시 진주대로 501 |
성격 | 전적 |
저자 | 노응규(盧應奎) |
편자 | 노성용(盧成容) |
간행자 | 노성용(盧成容) |
권책 | 1권 1책 |
행자 | 일정하지 않음 |
규격 | 28.9×20.6㎝ |
어미 | 무어미 |
[정의]
경상남도 거창군 고제면 괘암리 출신의 유학자이자 의병장인 노응규의 문집.
[저자]
노응규(盧應奎)[1861.3.15~1907]의 자는 성오(聖五), 호는 신암(愼菴), 본관은 광주(光州)다. 경상남도 거창군 고제면 괘암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노이선(盧以善), 어머니는 초계 정씨 정도원(鄭道元)의 딸이다. 성재 허전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30세를 전후하여 최익현(崔益鉉)·송병선(宋秉璿)·송근수(宋近洙) 등을 사사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 황후가 시해되자, 1896년 1월 안의(安義)에서 의거하여 의병을 모집하고 승려 서재기(徐再起)를 선봉장으로 하여 정도현(鄭道玄)·박준필(朴準弼) 등과 진주성을 공격하여 이를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때 진주의 정한용(鄭漢鎔) 의진이 노응규 의진에 합세하고, 같은 해 3월 28일 부산을 공격하고자 김해 일대에 병력을 집중시켰다. 그러나 4월 11일 일본군에게 선제 공격을 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정한용이 관군과 결탁하여 노응규를 배반함으로써 진주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또한 아버지와 형 노응교(盧應交)가 살해되고, 가산을 몰수당하였다.
1897년 10월 상경하여 「지부자현소(持斧自見疏)」를 올리고, 1902년 동궁 시종(東宮侍從)의 직책을 맡았으나, 1905년 일제의 강압으로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관직을 버렸다. 그리고 1906년 6월 최익현의 부하로 들어가 활약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순창 일대에서 거의 수일 만에 최익현 등 12인이 자진 체포되어, 의진이 해산되는 바람에 실현하지 못하였다.
그 뒤 경부 철도 파괴, 열차 전복 등의 활동을 하였으나, 한성 진군 계획의 누설로 체포되어 한성 경무서 감옥에서 옥중 투쟁을 계속하다가 1907년 옥사하였다. 1977년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저술로 1권 1책의 『신암유고(愼菴遺稿)』가 있다.
[편찬/간행 경위]
『신암유고』는 1993년 경상남도 창녕군에서 손자 노성용(盧成容)이 편찬 간행하였다.
[형태/서지]
『신암유고』는 1권 1책 분량으로, 현대 인쇄 기법으로 인쇄되었다. 책의 크기는 28.9×20.6㎝이다. 어미나 계선이 없다. 경상 대학교 도서관에 간행본이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신암유고』는 1권 1책 분량으로, 서는 여증동이 한글로 지었다. 본문은 「지부자현소」, 소해기(蘇海記), 신성당 김공 정려기(晨省堂金公旌閭記), 파평 윤씨 효렬 실기(坡平尹氏孝烈實記), 관왕묘 고제문(關王廟告祭文), 여진찰 김영덕(與晉察金永悳), 상신판서 기선(上申判書箕善), 여민승지 영적(與閔承旨永迪), 답권경증 삼현(答權景曾三鉉), 상이관찰 유인(上李觀察裕寅), 답족손 구용(答族孫九容), 상조판서 병식(上趙判書秉式), 상정부장서(上政府長書), 허노재 출처론(許魯齋出處論), 엄자릉 출처론(嚴子陵出處論), 태공여이제서(太公與夷齊書), 이제답태공서(夷齊答太公書), 면고문(面告文), 무술 일기(戊戌日記), 연보(年譜), 부증빙서(附證憑書)가 수록되어 있다. 부록은 통문(通文) 8편과 제문, 발문, 후지(後識)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지부자현소」는 1897년 10월 27일 상경하여 왕에게 올린 상소문이다. 그 외 면고문, 무술 일기 등은 당시 노응규의 의병 활동 모습과 사상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들이다.
[의의와 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