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3005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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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守可齋遺稿 |
영어공식명칭 | Sugajae Yugo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
집필자 | 구경아 |
저술 시기/일시 | 1851년~1906년 - 『수가재유고』 변효석이 저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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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 시기/일시 | 1957년 - 『수가재유고』 변원식이 간행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97년 - 『수가재유고』 영인본 간행 |
소장처 | 경상 대학교 도서관 - 경상남도 진주시 가좌동 900 |
소장처 | 국립 중앙 도서관 -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동 산60-1 |
소장처 | 계명 대학교 동산 도서관 - 대구광역시 달서구 신당동 1000-2 |
성격 | 문집 |
저자 | 변효석(卞孝錫) |
간행자 | 변원식(卞元植) |
권책 | 2권 1책 |
행자 | 10행 20자 |
규격 | 반곽(半郭) 20.0×15.6㎝|광곽(匡郭) 28.6×19.4㎝ |
어미 | 내향 흑어미(內向黑魚尾) |
권수제 | 수가재유고(守可齋 遺稿) |
판심제 | 수가재유고(守可齋 遺稿) |
[정의]
개항기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 출신 유학자 변효석(卞孝錫)의 문집.
[저자]
변효석[1851.1.2.~1906.11.7.]의 자는 사영(士永), 호는 수가재(守可齋),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고조할아버지 변사룡(卞師龍)은 황고(黃皐) 신수이(愼守彝)에게 수학하고, 역천(櫟泉) 송명흠(宋明欽)을 종유(從遊)[학식이나 덕행이 높은 사람을 좇아 함께 지냄]하였다. 아버지는 쌍가(雙可) 변치영(卞致英)이고, 어머니는 풍천 노씨(豊川盧氏) 노석진(盧錫震)의 딸과 의성 김씨(義城金氏) 김용구(金龍九)의 딸이다. 생부는 변치원(卞致源)이고, 생모는 팔계 정씨(八溪鄭氏) 정염(鄭琰)의 딸이다.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 병산 마을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족숙(族叔)[동성동본의 아저씨뻘이 되는 사람]인 효산(曉山) 변영규(卞榮奎)에게 수학하였고, 뒤에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에게 수학하였다. 변효석의 원래 이름은 변기옥(卞祺玉)이었고, 자는 성수(聖叟)였는데, 송병선이 이름과 자와 호를 지어 주었고, 심석재(心石齋) 송병순(宋秉珣)이 자서(字序)를 지어 주어서 권면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송병선은 고종 황제를 만나 일제의 침략을 막을 방책을 논의하려고 12월에 상경했으나 일제에 의해 차단되고 곧바로 대전으로 압송되었다. 스승의 상경 소식을 듣고 변효석이 한양으로 스승을 모시러 갔으나 압송된 소식에 이어 송병선의 자결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에 운구(運柩)를 송병선의 본집으로 모시고, 스승을 위해 심상(心喪) 3년을 계획하였으나, 1906년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부인은 세 명으로 파평 윤씨(坡平尹氏) 윤희도(尹熙道)의 딸, 팔계 정씨(八溪鄭氏) 정팔학(鄭八學)의 딸, 하빈 이씨(河濱李氏) 이귀섭(李龜燮)의 딸이다. 묘소는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 병산(屛山) 갑좌(甲坐)에 있다. 저술로 2권 1책의 『수가재유고(守可齋遺稿)』가 있다.
[편찬/간행 경위]
변효석이 별세하자 변효석의 종질(從姪)[사촌 형제의 아들] 변영소(卞永紹)가 가장(家狀)[조상의 행적에 관한 기록]을 짓고, 1908년 변효석의 아들 변영조(卞永稠)가 송병순에게 묘표를 받았다. 변영조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변영소가 유고를 수집하였으나 간행하지 못한 채 사망하였고, 이후 변효석의 재종손(再從孫)[사촌 형제의 손자] 변원식(卞元植)이 변영조의 유지를 받들어 간행 사업을 주도하였다. 1954년 변효석의 문인들이 모여 문집 간행을 위해 이보계(以輔契)를 결성하였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간행 사업이 시작되어 1956년에 변종식(卞鍾植)에게 「수가재기(守可齋記)」를, 송재성(宋在晟)에게 서문을 받았으며, 최진환(崔震煥)과 김병직(金秉直)·변규석(卞珪錫) 세 사람의 발문을 받아 1957년에 간행하였다. 이를 저본으로 1997년 경인 문화사에서 영인본을 간행하였다.
[형태/서지]
『수가재유고』는 2권 1책의 석판본(石版本)으로 된 문집으로, 크기는 반곽(半郭)[글이 담긴 테두리 안쪽 면]이 20.0×15.6㎝이고, 광곽(匡郭)[판의 사주를 둘러싼 검은 선]은 28.6×19.4㎝이다. 사주 쌍변(四周雙邊)[지면의 네 둘레를 두 개의 선으로 돌림]에 어미는 상 내향 흑어미(上內向黑魚尾)[위쪽의 물고기 꼬리 모양의 검은 어미가 아래쪽을 향하는 형태]이다. 권수제(卷首題)[본문 앞에 나오는 제목]와 판심제(版心題)[책장의 가운데 접힌 곳인 판심에 표시된 책의 이름]는 ‘수가재유고(守可齋遺稿)’이다. 각 면은 10행 20자로 되어 있다. 국립 중앙 도서관, 경상 대학교 도서관, 계명 대학교 동산 도서관 등지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수가재유고』는 상·하 2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권에는 시 113제(題)가 실려 있다. 시는 송병선의 환갑을 축하하는 시로 시작하여 송병선에 대한 만시로 끝을 낼 만큼, 스승 송병선과 송병순과 관련된 시가 주를 이루고 있다. 「배 심석 선생 등 고견암(陪心石先生登古見庵)」 외 35수는 가야산과 지리산 일대를 송병순과 함께 유람하며 지은 시들이다. 또 송병선 문하의 동학들과 함께 지은 연구(聯句)들은 송병선 문하의 활동과 교유 관계를 보여주는 자료이다. 「을사 십이월 연재 선생 승소 상경(乙巳十二月淵齋先生承召上京)」은 1905년 12월에 송병선이 고종을 알현하기 위해 한양으로 갈 때 문하의 동학들이 변효석에게 편지를 보내 선생을 모실 것을 부탁받고 한양으로 갔으나 길이 어긋나 뵙지 못하고 함께 간 사람들과 동숙하며 지은 시이다. 송병선이 보인 열사(烈士)의 모습을 지지하며 나라를 걱정하는 내용이다.
하권에는 서(書) 32편, 기(記) 3편, 서(序) 1편, 명(銘) 1편, 잠(箴) 1편, 제문 2편, 유사 1편, 잡저 1편이 실려 있다. 편지 가운데 송병선에게 보낸 편지는 변효석의 선조 유고 간행 사업으로 인해 찾아뵙지 못하는 죄송함을 드러냈고, 송병순에게 보낸 편지는 변효석의 집안 선조의 묘강명을 요청하는 내용이다. 또 동학들과 학문에 대해 논변한 내용들이 보이는데, 「답유치여정재 대학문목(答柳致汝貞才大學問目)」은 유정재(柳貞才)에게 『대학(大學)』 서문의 분절(分節)과 첫 번째 장의 친민(親民)을 신민(新民)으로 읽는 이유에 대해 답변한 내용이다.
기문 가운데 「배 연재 선생 유성산 일기(陪淵齋先生遊星山日記)」는 1901년 9월 19일부터 10월 1일까지 송병선과 성주를 유람한 내용을 기록한 일기이다. 「을병 일기(乙丙日記)」는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면서 송병선이 5적을 처단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고, 또 12월에 고종을 알현하려다 무산된 뒤로 음독 자결하자 변효석이 운구를 모셔와 장사를 지내고서 문집 간행에 참여한 1906년 7월 30일까지의 여정을 소상히 기록한 내용이다.
잡저 「거창 향교 도회중통남원교중문(居昌鄕校道會中通南原校中文)」은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이 이기설(理氣說)에서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견해와 다른 주장을 했는데도, 그의 손자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이 그대로 책을 간행하는 것에 대해 남원의 사림들이 성토하여 저지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부록에는 송병선이 변효석의 자를 붙여준 것에 대해 송병순이 설명한 「자설(字說)」과 변영소가 지은 가장, 김회석(金會錫)이 지은 행장, 송병순이 지은 묘표, 변종식이 지은 「수가재기(守可齋記)」, 제문 3편, 어명덕(魚命德)이 지은 수가재에서 강학을 하고 문집을 간행하기 위해 1954년에 결성된 이보계에 대한 서문인 「이보계서(以輔契序)」, 최진환과 김병직, 변규석의 발문이 있다.
[의의와 평가]
『수가재집』은 변효석의 학문 연원과 성향 및 위상을 알 수 있는 문집이다. 또한 「을병 일기」는 1905년부터 1906년까지의 조선의 정세와 송병선의 활약을 연구할 수 있는 중요 자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