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3005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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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居昌 章氏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경상남도 거창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조익현 |
본관 | 거창(居昌) - 경상남도 거창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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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지 | 거창 장씨 거창 입향지 - 경상남도 거창군 웅양면 한기리 |
세거|집성지 | 거창 장씨 거창 집성지 -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상림리 |
세거|집성지 | 거창 장씨 거창 집성지 -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정장리 |
세거|집성지 | 거창 장씨 거창 집성지 -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장팔리 |
성씨 시조 | 장종행 |
입향 시조 | 장삼장 |
[정의]
장종행을 시조로 하고 장삼장을 입향조로 하는 경상남도 거창군의 세거 성씨.
[개설]
최익현(崔益鉉)이 1903년에 지은 「구보 서(舊譜序)」에 따르면 장씨(章氏)는 본래 중국 건주의 명문으로, 송(宋)이 원(元)에게 망하자 바다를 건너 고려로 왔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장헌휘(章獻輝)는 판관(判官)으로 충무공을 따라 노량 해전에서 순절하였고, 장헌부(章獻富)는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순절해 선무 원종공신에 책봉되고 병조 참의가 추증되었다. 장만리(章萬里)는 선조가 의주로 피난할 때 왕을 업고 왜군의 칼날을 피하여 호성공신(扈聖功臣)으로 책봉되고 후에 승지(承旨)로 증직되었으며 나라에서 정려를 내렸다. 장일남(章逸男)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임금을 호종하고, 세자를 심양(瀋陽)으로 모시기도 하였다. 장봉익(章鳳翼)은 영조 무신란 때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순절하였다.
[연원]
거창 장씨(居昌章氏)는 고려 충렬왕 때 예문각 대제학(藝文閣大提學)을 지낸 충헌공(忠獻公) 장종행(章宗行)을 시조로 삼고 있다. 장종행의 아들 장두민(章斗民)이 공민왕 때 상장군으로 홍건적을 무찌른 공을 세워 아림군(娥林君)에 봉해져 경상남도 거창군 일대를 식읍으로 하사받아 후손들이 정착하면서 본관을 거창으로 삼았다. ‘아림(娥林)’은 거창의 옛 이름이다. 거창 지역의 거창 장씨는 참의공파(參議公派), 추담공파(秋潭公派), 처사공파(處士公派), 승지공파(承旨公派), 주부공파(主簿公派), 동호공파(東湖公派), 통정공파(通政公派)로 나뉜다.
[입향 경위]
장두민의 손자 장삼장(章參莊)은 고려를 향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거창군 웅양면 한기리에 내려와 살면서 자손들이 거창과 안의에 흩어져 살게 되었다.
[현황]
1934년에 조사된 조선 총독부의 자료에는 상동[현 거창군 거창읍 상림리]에 61가구의 거창 장씨가 살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해방 전후 시기에는 1백여 가구 중 세 성씨를 제외하고는 모두 거창 장씨가 살았던 거창의 대표적인 집성촌이었다. 2003년 통계에 따르면 거창에는 179가구 507명의 거창 장씨가 살고 있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관련 유적]
거창 장씨와 관련된 유적은 거창군 거창읍 상림리에 장종행을 기리는 건계정(建溪亭)과 보원재(報遠齋), 장두민의 업적을 기록해 놓은 아림군 세적비(娥林君世蹟碑)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