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3005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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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密陽 卞氏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경상남도 거창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어윤동 |
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 1483년 - 밀양 변씨 거창 입향조 변벽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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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 시기/일시 | 1485년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507년 - 밀양 변씨 거창 입향조 변벽 생원시에 합격 |
입향조 몰년 시기/일시 | 1528년 - 밀양 변씨 거창 입향조 변벽 사망 |
본관 | 밀양(密陽) - 경상남도 밀양시 |
입향지 | 밀양 변씨 거창 입향지 -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서변리 |
세거|집성지 | 밀양 변씨 거창 집성지 -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의 병산과 창촌 |
세거|집성지 | 밀양 변씨 거창 집성지 -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가지리 |
세거|집성지 | 밀양 변씨 거창 집성지 - 경상남도 거창군 고제면의 용강 |
묘소|세장지 | 밀양 변씨 거창 세장지 - 경상남도 거창군 주상면 도평리 영언재 뒷산 |
성씨 시조 | 변정실(卞庭實) |
입향 시조 | 변벽(卞璧) |
[정의]
변정실(卞庭實)을 시조로 하고 변벽(卞璧)을 입향조로 하는 경상남도 거창군의 세거 성씨.
[개설]
밀양 변씨(密陽卞氏)는 중국에서 귀화한 성씨로, 당 현종 때의 예부 상서였던 변원(卞源)의 후손이다. 현 초계 변씨(草溪卞氏)에서 갈라져 나왔는데, 고려 때 국자진사가 되고 밀양에서 대대로 살아 온 변고적(卞高迪)부터 갈라졌다. 분관하였으나 초계 변씨와 대종회를 같이하고 있다.
계파는 2세에서 장(長)이 광(光), 중(仲)이 요(耀), 계(季)가 휘(輝)인데, 10세에 와서 장(長)이 6개 파, 중(仲)이 4개 파, 계(季)가 5파인데, 거창의 입향조인 15세 변벽(卞璧)은 중(仲)의 춘당공파(春堂公派)로, 춘당 변중량(卞仲良)의 5세손이다.
[연원]
변정실(卞庭實)은 고려 성종 때에 문과에 급제하고 문하시중으로 팔계군(八溪君)에 봉해졌으며 본관을 초계로 이어 왔는데, 시조의 둘째 아들 변요(卞耀)의 손자인 국자진사 변고적이 11세기 중엽 고려 인종 때에 초계에서 분관하여 밀양 변씨의 시조가 되었다. 거창에 거주하는 밀양 변씨는 춘당 변중량의 5세손인 구산(龜山) 변벽의 후손들이다.
12세인 변벽은 기묘 명현(己卯名賢)에 들 정도로 학문과 덕행이 높았으며, 증손자들인 15세 변청(卞淸)과 변혼(卞渾)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고, 변준(卞浚)은 효성이 지극해 정려가 내렸다. 22세 변직현(卞稷賢)과 그 부인 죽산 전씨(竹山全氏)는 효자와 효부로 쌍려(雙閭)가 내렸고, 24세 변양석(卞穰錫)은 유림 대표로 파리 장서에 서명한 독립 유공자이다.
현존하는 거창 밀양 변씨 가문의 문집은 입향조인 12세 변벽의 『구산집(龜山集)』, 15세인 변청의 『삭주 유사집(朔州遺事集)』, 16세인 변창후(卞昌後)의 『월담집(月潭集)』, 24세 변효석(卞孝錫)의 『수가재집(守可齋集)』, 26세 변종식(卞鍾植)의 『경암집(警菴集)』 등이 있다.
[입향 경위]
거창 입향조인 변벽은 1483년 경상남도 합천군 야로면 둔평리에서 충순위(忠順衛) 신보(申甫)의 아들로 태어났다. 세살 때 아버지가 죽자 어머니 동래 정씨(東萊鄭氏)가 의지할 곳을 찾아 친정인 거창의 못질로 옮겨 왔으며, 변벽은 외할아버지인 만호(萬戶) 정사종(鄭嗣宗)의 보호와 지도 아래 성장하여 명망 높은 유학자가 되었으며, 그 후손들이 거창에 세거하며 번창하게 되었다.
[현황]
2000년의 통계에 따르면 거창에 거주하는 밀양 변씨는 226가구 580명으로 집계되어 있으며, 대표적인 집성촌은 거창군 가조면 병산리이다. 그 외에 창촌, 거창읍의 가지리, 고제면의 용강 등이 집성촌이었으나 지금은 옛날 같지 않아 많이 희석된 셈이다.
[관련 유적]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변청의 유적비와 그가 노닐던 부유정(鳧遊亭), 변신후(卞信後)가 노니던 압구정(押鷗亭), 병산 입향조인 변청을 위한 산천재(山泉齋), 변희석(卞熙錫)이 노니던 병계 정사(屛溪精舍)가 있다. 또한 경상남도 유형 문화재 제169호 ‘춘당 문집 책판 및 춘정집 책판(春堂文集冊板 및 春亭集冊板)’의 『춘당집(春堂集)』과 『춘정집(春亭集)』, 『구산실기(龜山實記)』의 책판 300매가 소장된 장판각(臟板閣)이 있다. 변중량·변계량·변벽을 모셨다가 1868년에 훼철된 병암 서원(屛巖書院)의 유지(遺址) 등이 병산에 있고, 첨정공(僉正公) 변청을 기려 세운 계명재(啓明齋)가 가북면 박암리 계명골에 있다.
변유도(卞惟道)를 기려 세운 문봉재(文峰齋), 변규칠(卞圭七)이 생가와 양가의 두 어머니를 기려서 세운 양모정(兩慕亭)이 창촌에 있다. 장기리의 만학정은 열호정(悅乎亭) 변유도(卞惟道)가 노닐던 곳으로 경내에는 유허비가 있으며 기미 독립 만세의 기치를 높이 든 유서 깊은 곳이다.
이초화(李楚和)의 처 밀양 변씨 선행비,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벽봉(碧峰) 변혼(卞渾)의 신도비, 변창후(卞昌後)를 기려 세운 문산재(文山齋)는 거창읍 가지리에 있다. 문의공(文毅公) 김식(金湜)과 구산 변벽이 1520년에 만났던 봉황대(鳳凰臺)와 변벽을 기려 세운 영언재(永言齋)는 주상면 도평리에 있다. 주상면 거기리에는 변직현(卞稷賢)과 그 부인 죽산 전씨(竹山全氏)의 효자·효부 쌍려(雙閭)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