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300592 |
---|---|
한자 | 恩津 林氏 |
영어공식명칭 | Eunjin Im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경상남도 거창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어윤동 |
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 1410년 전후 - 은진 임씨 거창 입향조 출생 추정 |
---|---|
입향 시기/일시 | 1450년 전후 - 은진 임씨 거창 입향 추정 |
입향지 | 은진 임씨 거창 입향지 -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갈계리 |
세거|집성지 | 은진 임씨 거창 집성지 -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갈계리 |
묘소|세장지 | 은진 임씨 거창 세장지 -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갈계리 주변 산 |
성씨 시조 | 임성근(林成槿) |
입향 시조 | 임천년(林千年) |
[정의]
임성근을 시조로 하고 임천년을 입향조로 하는 경상남도 거창군의 세거 성씨.
[개설]
임씨의 도시조(都始祖)[모든 임씨의 시조]는 임팔급(林八及)으로, 당나라 때에 귀화한 8학사의 한 사람이다. 신라에 귀화했으며 자손이 흥성해지면서 많은 파로 분관되었다. 은진 임씨(恩津林氏)는 1세조 임성근(林成槿)이 개성에 살다가 2세 임정(林挺) 때 금산군 안성으로 옮겼고, 3세 임식(林湜)은 함양에서 살게 되었다. 4세 임천년(林千年)이 의령 현감으로 재직하다가 처가 거제 반씨(巨濟潘氏)의 고향인 거창군 북상면 갈계리[당시는 안의]의 산수가 빼어나 이거했다. 거창의 은진 임씨는 고관보다 유학자가 많이 배출된 점이 특색이며 영남에서 인정하는 명문이 되었다.
[연원]
중국 주나라의 무왕이 은(殷)나라 삼인(三仁) 중의 한명인 비간(比干)의 유복자(遺腹子)[태어나기 전에 아버지를 여읜 아들]에게 임견(林堅)이라는 성명을 하사한 일에서 임씨가 유래했다. 84세를 내려와 당(唐)의 임팔급이 신라에 귀화하여 자손이 번성해지며 평택 임씨를 비롯한 많은 관향으로 나누어졌는데, 은진 임씨도 그중의 하나다.
은진 임씨는 4세에 와서 예랑공파와 의령공파로 분파되었다. 예랑공파의 후손은 논산에 세거하였고, 의령공파의 파조인 임천년(林千年)은 의령현감으로 재직하다가 처가가 있는 안음의 산수가 아름다워 지금의 거창군 북상면 갈계리에 정착하였다.
6세인 석천(石泉) 임득번(林得蕃)은 생원으로 도학이 높아 역천사(嶧川祠)에 봉향되었는데, 아들인 갈천(葛川) 임훈(林薰)·도계(道溪) 임영(林英)·첨모당(瞻慕堂) 임운(林芸)과 함께 4부자를 별묘에 봉향하고 있다. 임훈과 임운은 용문 서원(龍門書院)에 배향되었으나 훼철되었다. 유고집이 있는 선비가 40여 명이고 수많은 정자와 재실이 곳곳에 남아 있다.
[입향 경위]
은진 임씨 의령공파의 파조이며 입향조인 4세 임천년은 의령 현감을 지낸 인물이다. 거제 반씨 반안(潘安)의 사위이고 효자 반전(潘腆)의 손녀사위인데, 처가가 있는 원학동 갈계리의 산수가 너무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정착하게 되었다.
[현황]
2000년의 통계에 따르면 거창에 거주하는 은진 임씨는 271가구 643명으로 집계되어 있다. 대표적인 집성촌은 갈계리로 2016년 현재 현재 107가구가 잔류하고 있으며, 많은 유적들이 남아 있다.
[관련 유적]
〈갈계리에 있는 유적〉
o 별묘(別廟): 1658년에 창건했으며 출입문은 정의문(正義門)으로 6세인 임득번과 그의 아들 임훈·임영·임운과 함께 4부자를 봄가을에 봉향하고 있다.
o 석천재(石泉齋): 별묘 밑에 있으며, 6세인 임득번을 기려서 1691년에 창건했으며, 곽종석(郭鍾錫)의 기문이 있다.
o 거창 갈계리 임씨 고가: 임훈의 집으로, 1507년에 지었으며 대문에는 ‘효간공 홍문(紅門)’이 있다. 경상남도 민속 문화재 제9호로 지정되었다.
o 갈천 서당(葛川書堂): 갈천 임훈이 강학한 곳으로, 1533년에 창건했으며 경상남도 유형 문화재 제295호이다. 묘정에는 갈천 선생 신도비를 비롯해 도계 선생 은진 임공 추모비와 첨모당 신도비가 나란히 서 있다.
o 정려각: 임훈과 임운의 빼어난 효성을 기려 1564년에 내린 생정(生旌)[생시에 내린 정려]였는데, 그 뒤에 15세 임지예(林之藝), 16세 임경원(林慶源)·임한신(林翰臣), 임한신의 처 고령 박씨의 정려 등을 한곳에 모아 놓은 것이다.
o 효간공 가묘(孝簡公家廟); 대종가 서편에 있으며, 효간공은 임훈의 시호이며, 가묘는 집안의 사당이다.
o 장판각(藏板閣); 임훈과 임운 두 사람의 문집 목판을 소장하고 있으며, 두사람의 문집 목판인 ‘갈천 선생 문집 책판 및 첨모당 선생 문집 책판’은 경상남도 유형 문화재 제168호로 지정되어 있다.
o 노동 서당(蘆洞書堂): 임운이 강학하던 곳에 아들 임승신(林承信)과 조카 임승석(林承錫)·임승경(林承慶)이 1563년에 산수리 노동 회암대 위에 세웠으나 소실된 것을, 후손들이 1972년에 갈계 마을에 지었다.
o 서간소루(西澗小樓): 임승신이 1580년에 지은 누각을 고쳐 지은 것이며, 솟을대문에는 임운의 효행과 학문을 기려 세운 홍문이 있다.
o 갈계숲: 은진 임씨 종중 소유의 2㏊ 넓이의 섬으로 경관이 좋으며, 임훈을 위한 가선정(駕仙亭), 임영을 위한 도계정(道溪亭)과 경모재(敬慕齋), 임여남(林汝枏)을 위한 병암정(屛岩亭) 등이 있다.
o 용암정(龍巖亭): 14세 임석형(林碩馨)이 1775년에 세운 건물이다.
o 사봉재(四奉齋): 10세 임여식(林汝植)을 기려 1827년에 세웠다.
o 봉선재(奉先齋): 13세 임상무(林尙茂)를 기려 1878년에 세웠다.
o 농은정(農隱亭): 17세 임수준(林秀準)이 노닐던 곳에 후손들이 1958년에 세웠다.
o 택존재(澤存齋): 17세 임수양(林秀養)이 가문의 친목을 위해 세웠다.
o 묵계재(墨溪齋): 14세 임응태(林應台)를 기려 1876년에 세웠다.
o 심양재(心陽齋): 14세 임응규(林應奎)를 기려 1959년에 세웠다.
o 운강재(雲岡齋): 16세 임태원(林台源)을 기려 1948년에 세웠다.
o 임지예(林之藝) 일성비(日省碑): 15세 임지예의 효성을 기려 세웠다..
o 학산재(學山齋)와 행단정과 시비림(詩碑林): 거창군 의원을 역임한 21세 행단 임영선(林永善)이 갈계리 입구 우측에 마련하였다. 경내에는 대형의 ‘행단 임공 표적비’와 100여 개 시비(詩碑)가 있는데, 은진 임씨의 훌륭한 조상을 기려서 국내의 저명한 한시인들이 읊은 것으로 갈계리의 새로운 명물이 되었다.
o 은진 임씨 사료관: 은진 임씨 가문에 내려오는 귀중한 문헌과 유물 등을 전시하고 있다.
〈갈계리 이외의 유적〉
o 황암재(黃岩齋): 소정에 있으며 10세 임여추(林汝樞)를 기려 세웠다.
o 임진원(林眞源) 송덕비: 농산리 용수막에 있으며, 감역인 16세 임진원(林眞源)의 덕행을 기려 세웠다.
o 덕산정(德山亭): 농산리 강선대에 있으며, 16세 임진원을 기려서 1921년에 세웠다.
o 모암정(帽巖亭): 농산리 강선대에 있으며, 15세 임지예를 기려서 1921년에 세웠다.
o 백모정(柏慕亭): 병곡리 산 101번지에 있으며, 모범 독림가로 훈장을 받은 18세 임석희(林碩熙)가 지은 정자이다.
o 마학동(磨學洞) 사적비: 산수리에 있으며, 임득번이 1523년에 아들 임훈·임영·임운 3형제를 가르치기 위해 서당을 지었던 곳에 세웠다.
o 모이재(慕怡齋): 남하 지산에 있으며 13세 임문서(林文瑞)를 기려서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