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 전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300594
한자 旌善 全氏
영어공식명칭 Jeongseon Jeon Clan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경상남도 거창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어윤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입향지 정선 전씨 거창 입향지 - 경상남도 거창군 마리면 영승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정선 전씨 거창 집성지 - 경상남도 거창군 마리면 영승리
세거|집성지 정선 전씨 거창 집성지 - 경상남도 거창군 마리면 월계리 학동 마을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정선 전씨 거창 집성지 - 경상남도 거창군 마리면 말흘리 송림 마을 지도보기
묘소|세장지 정선 전씨 거창 세장지 -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당산리 금사동 지도보기
성씨 시조 도시조(都始祖) 전섭(全聶)|득관조(得貫祖) 전선(全愃)
입향 시조 전맹겸(全孟謙)

[정의]

도시조는 전섭, 득관조는 전선, 입향조가 전맹겸인 경상남도 거창군의 세거 성씨.

[개설]

전씨(全氏)의 도시조(都始祖) 전섭(全聶)은 온조(溫祚)가 백제를 건국할 때 십제공신(十濟功臣)의 한 명으로 환성군(歡城君)에 봉해졌으며, 그 후손들이 18관향으로 분관(分貫)되었다. 정선 전씨(旌善全氏)가 최초로 관향을 가져 18개 관향 중에서 종가(宗家) 격이다. 7세까지 계대가 확실치 않고 8세 전선(全愃)이 정선군(旌善君)에 봉해져 정선 전씨 득관조(得貫祖)가 되었다. 전선은 723년(성덕왕 22) 당나라에 들어가 중국의 문물을 국내에 소개한 인물로, 후에 벼슬이 전법판서(典法判書)에 올랐다. 29세 채미헌(採薇軒) 전오륜(全五倫)은 두문동 72현 중 한 명이며, 전오륜의 장남 전맹겸(全孟謙)이 거창[당시는 안의] 입향조로 마리면 영승리에 정착하였다.

[연원]

전씨의 도시조 전섭의 후손이 18개 관향이 되었는데, 정선 전씨가 최초로 관향을 획득하여 모든 전씨의 종가인 셈이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고려와 운명을 같이한 두문동 72현 중 한 명인 전오륜의 장남 전맹겸이 강양 군수를 역임하고 만년에 마리면 영승리에 자리 잡아 거창 입향조가 되었다.

33세 사락정(四樂亭) 전철(全轍)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처외숙(妻外叔)인데, 1543년에 영승을 방문한 이황은 사락시(四樂詩)를 지어 정선 전씨영승을 빛나게 하였다. 1932년에 유림의 발의(發議)로 영승 서원을 세워 퇴계 이황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전철을 봉안하여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입향 경위]

30세 전맹겸이 강양 군수 임기를 마치고 당시 안음의 원학동 산수에 매료되어 영승촌에 초가 정자를 지어 한가로이 수양했으며, 증손자인 전철 대에 와서 퇴계에 의해 ‘사락정(四樂亭)’이라 명명되었다.

[현황]

2000년 현재 우리나라 전씨 전체 인구수는 15만 3,000가구 약 50만 명으로, 성씨별 인구 순위는 21위이다. 2000년 통계 자료에 따르면 거창군 내에 거주하는 정선 전씨는 155가구 407명이며, 마리면 영승리에 잔류하고 있는 세대는 18가구에 불과하다. 마리면 월계리 학동 마을말흘리 송림 마을도 집성촌이었으나 많이 희석되었다. 재일 교포 재력가인 47세 전병수(全炳洙)에 의해 영승 서원(迎勝書院)과 경모재(敬慕齋) 및 이요당(二樂堂)이 중건(重建)되었다.

[관련 유적]

영승의 유적〉

o 사락정(四樂亭): 마리면 영승리 앞 냇가에 있으며, 30세 전맹겸이 노닐던 곳이자 33세인 전철이 강학하던 곳이다. 1524년에 고쳐서 짓고, 1723년에 홍수로 유실된 것을 이듬해 다시 지었다. 퇴계 이황의 사락시가 걸려 있고, 경내에 사락정 유허비가 있다.

o 영승 서원(迎勝書院): 마리면 영승리 앞 서남쪽 냇가에 있으며, 퇴계 이황동춘당 송준길, 사락정 전철을 봉향하고 있다. 1932년 유림의 발의로 창건되었고, 후손인 재일 교포 전병수가 기금을 내어 중건하였다.

o 동원재(同源齋): 마리면 영승리 마을 안에 있으며, 43세 전정능(全政能)을 기려 1976년에 세웠다.

o 농월담(弄月潭): 마리면 영승리 마을 앞에 있고, 33세인 진사 전식(全軾)의 비가 있다.

o 경모재(敬慕齋) 및 이요당(二樂堂): 마리면 영승리 마을 안에 있다. 경모재는 35세인 첨지공(僉知公) 전형(全珩)과 그 후손들을 제사 지내던 곳이고, 40세 가선대부 이요당 전기(全淇)를 추모하여 지었다. 후손인 재일 교포 전병수가 2011년에 거금을 쾌척해 2층으로 중건하면서 하층은 경모재로, 상층은 이요당으로 삼았다. 경내에 통정대부 전공 유적비와 이요당 전공 유적비가 있다.

o 상호군 정선 전공 유적비(上護軍旌善全公遺蹟碑): 영승 서원 옆에 있으며, 입향조인 30세 전맹겸을 기려 세웠다.

영승 이외의 유적〉

o 정선 전씨 열녀각: 울화 앞 큰길가에 있으며, 정유열(鄭惟說)의 아내로 어머니 초계 정씨와 함께 순열(殉烈)하여 정려가 내려진 모녀의 정려각이 가까이 서 있다.

o 우수재(迂叟齋): 마리면 월계리 학동 마을 서쪽에 있으며, 전철의 증손자인 36세 전시언(全時彦)을 기려 1930년에 세웠다.

o 효자 전안택(全安宅) 정려: 마리면 월계리 학동 마을 어귀에 있으며, 효행으로 1765년에 정려가 내렸다.

o 삼우당(三友堂): 마리면 말흘리 송림 마을에 있으며, 전석환을 제사지내는 제각(祭閣)이다.

o 숭모재(崇慕齋): 마리면 말흘리 송림 마을에 있으며, 전성직(全性直)과 전응종(全應宗)을 제사지내는 제각(祭閣)이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