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3008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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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景男 |
이칭/별칭 | 영호(瀯湖),여술(汝述) |
분야 | 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남도 거창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채광수 |
출생 시기/일시 | 1556년 - 윤경남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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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99년 - 윤경남 장수 현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608년 - 윤경남 광흥창 주부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609년 - 윤경남 개령 현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612년 - 윤경남 운봉 현감 임명 |
몰년 시기/일시 | 1614년 - 윤경남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893년 - 윤경남 대사헌 증직 |
출생지 | 윤경남 출생지 - 경상남도 거창군 남하면 양항리 |
묘소|단소 | 윤경남 묘소 - 경상남도 합천군 묘산면 화양리 |
성격 | 의병 |
성별 | 남 |
본관 | 파평(坡平) |
대표 관직|경력 | 개령 현감 |
[정의]
조선 후기 거창 출신의 의병장.
[가계]
윤경남(尹景男)[1556~1614]의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자는 여술(汝述), 호는 영호(瀯湖)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사간(司諫) 윤경(尹耕)이고 할아버지는 회령 판관(會寧判官) 윤삼빙(尹三聘)이다. 아버지는 윤은신(尹殷臣), 어머니는 호군(護軍) 이효원(李孝元)의 딸 숙부인(淑夫人) 완산 이씨(完山李氏)이다. 부인은 이몽룡(李夢龍)의 딸 숙인(淑人) 완산 이씨이다.
[활동 사항]
윤경남은 1556년(명종 11)에 경상남도 거창군 남하면 양항리에서 태어났다. 3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12세에 학산(學山) 문산두(文山斗)에게서 그의 아들인 모계(茅谿) 문위(文緯)와 함께 학문을 배웠다. 동계(桐溪) 정온(鄭蘊), 존재(存齋) 곽준(郭䞭), 어적(漁適) 유중룡(柳仲龍)과 교유하였다. 과거에는 뜻을 두지 않았다.
윤경남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문위와 함께 의병을 모집하고 고령의 송암(松菴) 김면(金沔) 휘하로 들어가 진을 거창으로 옮기고 참모로 활약하였다. 각지에 격문을 띄우니 4~5일간 2,000여 명이 모였다. 김면과 함께 출진하여 낙동강의 적선을 공격하여 왜적 80여 명의 수급을 베고 적선 2척을 획득해 배 안에 있던 보물을 초유사(招諭使)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의 진중으로 보냈다. 금산(金山)과 지례(知禮)의 적들이 우현(牛峴)을 넘는다는 것을 듣고는 거창이 진주 이상의 요충지이며, 거창을 잃으면 10여 읍을 지키기가 어렵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김면은 병사들을 데리고 거창으로 돌아갔고, 이 때문에 금산과 지례의 적들을 막을 수가 있었다. 그 후로도 두곡(豆谷), 사랑암(沙郞巖)에서 전투를 하였다. 다음해인 1593년(선조 26) 김면이 진중에서 죽자 문위와 함께 뒷일을 처리하였다.
1593년(선조 26) 4월에 김성일이 포상할 것을 건의해 군기시 주부(軍器寺主簿)에 제수되었지만 윤경남은 왜적이 아직 물러나지 않아서 불가하다고 사양하였다. 1599년(선조 32)에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익위사 익찬(翊衛司翊贊), 이후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모두 병을 핑계로 나아가지 않았다. 1599년(선조 32) 4월에 장수 현감(長水縣監)에 제수되었고, 1605년(선조 38)에 선무공신 3등에 녹훈되었다. 1608년(선조 41)에 광흥창 주부(廣興倉主簿)로 옮겼다. 1609년(광해군 1)에는 개령 현감(開寧縣監)에 임명되었고, 1612년(광해군 4)에는 운봉 현감(雲峰縣監)이 되었다. 운봉 현감으로 있던 1614년(광해군 6) 2월 3일에 5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윤경남의 저서로는 『영호 실기(瀯湖實記)』가 있다.
[묘소]
묘소는 경상남도 합천군 묘산면 화양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윤경남은 1893년(고종 30)에 자헌대부 사헌부 대사헌 겸 성균관 좨주(資憲大夫司憲府大司憲成均館祭酒)에 증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