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3008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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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應斗 |
이칭/별칭 | 추경(樞卿) |
분야 | 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남도 거창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채광수 |
몰년 시기/일시 | 1592년 - 정응두 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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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시기/일시 | 1908년 - 정응두 유허비 건립 |
출생지 | 정응두 출생지 - 경상남도 거창군 남하면 무릉리 |
사당|배향지 | 영빈 서원 - 경상남도 거창군 남하면 무릉리 1123 |
성격 | 의병 |
성별 | 남 |
본관 | 동래(東萊) |
[정의]
조선 전기 거창 출신의 의병장.
[가계]
정응두(鄭應斗)[?~1592]의 본관은 동래(東萊), 호는 추경(樞卿)이다. 아버지는 정붕(鄭鵬)이다.
[활동 사항]
정응두는 경상남도 거창군 남하면 무릉리에서 태어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거창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592년(선조 25)에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이끄는 왜군이 김해성을 함락하고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 유숭인(柳崇仁)이 지키고 있는 창원성으로 진격해 오자, 정응두는 자신의 의병 부대를 이끌고 창원성 전투에 합류하였다. 하지만 정응두는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고, 이에 조정에서는 정3품 판결사(判決事)로 증직하였다. 정응두가 죽고 111년이 지난 뒤에 이장을 하려고 관을 열어 보니 얼굴 모양이 산 사람과 같아서 모두가 이상하게 생각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거창군 남하면 무릉리에 1908년 정응두 유허비가 세워졌고, 1909년 신도비가 다시 지어졌다. 또한 같은 무릉리에 위치한 영빈 서원(瀯濱書院)에 정구(鄭矩), 정종(鄭種), 정표(鄭彪), 정시수(鄭時修), 정영진(鄭榮振)과 함께 배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