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3008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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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于勒 |
영어공식명칭 | Ureuk |
분야 | 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경상남도 거창군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이광우 |
[정의]
삼국 시대 12곡을 지어 지금의 경상남도 거창군 지역을 노래한 대가야 출신의 음악가.
[개설]
우륵(于勒)은 삼국 시대를 대표하는 음악가로, 대가야(大加耶) 가실왕(嘉實王)의 명에 따라 12곡(曲)을 만들었다. 12곡 중 하나인 ‘거열(居烈)’은 지금의 경상남도 거창군 지역의 옛 지명이다.
[활동 사항]
우륵은 대가야 가실왕 대 사람으로 성열현(省熱縣)[지금의 경상북도 고령군 일대로 추정]에서 출생하였다. 우륵은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 대략 520년을 전후하여 가실왕의 부름을 받아 대가야 왕경(王京)으로 들어왔다. 가실왕은 우륵에게 중국의 악기인 쟁(箏)을 모방하여 12현의 악기인 가야금을 만들게 하였다. 이후 우륵은 여러 가야금 악곡을 작곡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는 대가야가 신라와 백제의 압박을 받던 시기였으며, 내부적으로도 안정되지 못한 상태였다. 결국 우륵은 가야금을 가지고 신라로 망명하였는데, 당시 신라 왕이었던 진흥왕(眞興王)[540~576]은 우륵을 국원경(國原京)[지금의 충청북도 충주시]에 살게 하였다. 이곳에서 우륵은 계속 음악 활동을 전개하였고, 우륵의 음악은 신라의 대악(大樂)[궁중 음악]으로도 지정되었다. 또한 진흥왕은 법지(法知)·계고(階古)·만덕(萬德)을 국원경으로 보내 우륵에게 음악을 배우게 하였다.
[저술 및 작품]
우륵의 대표적인 가야금 곡으로는 대가야에서 활동할 때 가실왕의 명을 받고 지은 12곡이 있다. 이 중 5곡은 신라로 망명한 후 제자들에 의해 정리되어 신라의 대악이 되었다. 또한 하림조(河臨調)와 눈죽조(嫩竹調) 2조의 악조(樂調)로써 모두 185곡의 가야금 곡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거창과 우륵의 12곡(曲)]
우륵은 520년 전후, 대가야에 있을 때 가실왕의 명으로 가야금 12곡을 지었는데, 그 곡명은 『삼국사기(三國史記)』 권32 잡지(雜志) 악(樂) 가야금 조(加耶琴條)에 다음과 같이 수록되어 있다. "우륵이 지은 12곡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하가라도(下加羅都), 두 번째는 상가라도(上加羅都), 세 번째는 보기(寶伎), 네 번째는 달이(達已), 다섯 번째는 사물(思勿), 여섯 번째는 물혜(勿慧), 일곱 번째는 하기물(下奇物), 여덟 번째는 사자기(師子伎), 아홉 번째는 거열(居烈), 열 번째는 사팔혜(沙八兮), 열한 번째는 이사(爾赦), 열두 번째는 상기물(上奇物)이다."
그런데 12곡의 곡명은 모두 대가야의 지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12곡의 지명 모두를 비정하는 데에는 연구자들 간의 의견 차이가 있지만, 아홉 번째 ‘거열’을 지금의 경상남도 거창군 일대로 비정하는 데에는 큰 이견이 없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34 지리지(地理志) 강주 조(康州條)에 따르면 “거창군은 본래 거열군(居烈郡)으로 혹은 거타(居陀)라고도 한다. 경덕왕(景德王) 때 이름을 고쳤다. 지금도 그대로 따른다.”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편, 가실왕은 12곡을 짓기 전 우륵에게 “여러 나라의 방언이 각기 다른데, 성음(聲音)이 어찌 하나일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대가야 각 지방에는 각기 다른 성음으로 된 곡조가 존재했었고, 가실왕은 이를 하나의 틀로 통일한 12곡 제작을 우륵에게 명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우륵이 신라로 망명하기 직전 대가야는 대내외적으로 매우 어려웠던 상태였기에, 가실왕 입장에서는 우선적으로 내부 결집을 꾀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며, 그 방법 중 하나가 12곡 제작을 통한 음악의 통일로 풀이할 수 있다. 즉, ‘거열’을 비롯한 12곡의 지명은 모두 대가야의 요지(要地)였던 것이다. 실제 거창으로 비정되고 있는 ‘거열’은 경상남도의 가장 서북방에 위치하여, 북쪽이나 서쪽에서 영남권으로 진입할 때 지나야 하는 중요한 길목 중 한 곳이다. 당시 대가야의 입장에서도 ‘거열’이 백제와 인접한 요지였기에 12곡의 한 곡명으로 등장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