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3008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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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朱南守 |
영어공식명칭 | Junamsu |
분야 | 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거창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이광욱 |
[정의]
일제 강점기에 거창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항일 운동가.
[가계]
주남수(朱南守)[1892~?]는 경상남도 거창에서 한학자 주회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활동 사항]
1919년 3·1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될 때 3월 20일 거창에서는 거창읍 교회를 설립한 주남수의 형 주남고를 중심으로 거창읍 교회 교인들이 만세 시위를 주도했다. 주남고는 당시 같은 교회 교인이던 오형선의 집에서, 김천 지역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한 후 비밀 결사인 적성단에 가입해 만주의 독립군 양성 학교 입교생을 모집하던 김태연, 이덕생 등과 만나 군자금 모금과 의용병 모집에 대해 모의하였다. 항일 민족 운동에 앞장선 형의 영향을 자연스럽게 받은 주남수는 형의 권유로 1919년 8월 이사술(李四述)·이성년(李聖年)·백기주(白基周) 등과 함께 만주 군정서에 의용병으로 파견되었다. 동향 사람 신도출은 이 일을 위해 군자금 813원을 내기도 했다.
주남수는 신흥 무관 학교에 입교해 군사 교육을 받은 후 1920년 2월에 고향인 거창으로 돌아왔다. 고향으로 돌아온 주남수는 거창읍 교회 장로 오형선 등과 군자금 모금을 협의했고, 함양의 정장현을 설득해 군자금을 받아 냈다. 그리고 오형선의 집에서 『신한 별보(新韓別報)』와 대한민국 임시 정부 헌장을 담은 「국민 해혹」을 등사기로 인쇄했다. 『신한 별보』에는 "조선의 독립은 미국 등 20여 개국이 승인하였고 소련은 조선 독립을 위해 일본과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선언하였다."라는 내용이 실려 있었다. 「국민 해혹」은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며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 등 임시 헌장의 내용을 그대로 실었다. 주남수는 주변의 믿을 수 있는 지인들, 동료들에게 이를 배포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그러나 이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21년 1월 부산 지방 법원 거창 지청에서 주남수는 징역 3년, 오형선은 징역 2년, 주남고는 징역 1년, 이갑수는 징역 6개월을 각각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상훈과 추모]
주남수는 1982년에 대통령 표창을 받았으며, 1990년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