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3008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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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全駟玉 |
이칭/별칭 | 양천(陽泉) |
분야 | 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거창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서용태 |
출생 시기/일시 | 1915년 - 전사옥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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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29년 - 전사옥 진주 고등 보통학교 입학 |
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30년 1월 17일 - 진주 고보 사건 발생 |
수학 시기/일시 | 1930년대 초중반 - 전사옥 일본 주오 대학 재학 |
활동 시기/일시 | 1943년 - 전사옥 조선 건국 동맹 산하 농민 동맹 활동 |
활동 시기/일시 | 1945년 - 전사옥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45년 11월 29일 - 전사옥 전국 청년 단체 총동맹(청총) 서울시 연맹 중앙 집행 위원으로 선출 |
활동 시기/일시 | 1947년 6월 - 전사옥 제2차 미·소 공동 위원회에 청총의 대표로 참석 |
추모 시기/일시 | 2007년 6월 10일 - 전사옥 제단비 건립 |
추모 시기/일시 | 2019년 8월 15일 - 전사옥 건국포장 서훈 |
출생지 | 전사옥 출생지 - 경상남도 거창군 가북면 해평리 |
학교|수학지 | 가조 공립 보통학교 - 경상남도 거창군 |
학교|수학지 | 진주 고등 보통학교 - 경상남도 진주시 |
학교|수학지 | 주오 대학교 - 일본 도쿄 |
활동지 | 전사옥 활동지 - 경기도 양주군 |
활동지 | 전사옥 활동지 - 서울특별시 |
묘소 | 전사옥 제단비(祭壇碑) - 경상남도 거창군 가북면 해평리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전국 청년 단체 총동맹 서울시 연맹 중앙 집행 위원 |
[정의]
경상남도 거창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양천(陽泉) 전사옥(全駟玉)은 1915년 거창군 가북면 해평리에서 태어났다. 거창 가조 공립 보통학교[지금의 가조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부터 우수한 학업 성적과 명석한 두뇌로 인해 장래가 촉망되었다. 광주 학생 운동이 일어난 해인 1929년 진주 고등 보통학교[지금의 진주 고등학교]에 진학하였다. 1929년 11월 광주에서부터 시작해서 이듬해 초까지 전국 각지에서 반일 학생 투쟁이 일어날 때, 서부 경남 지역에서도 1930년 1월 17일 진주 고보와 일신 여고보 학생 500여 명이 항일 시위를 벌이다 수많은 학생들이 퇴학 처분을 당하고 주모자 20여 명은 구속되었다[진주 고보 사건]. 당시 진주 고보에 재학 중이던 전사옥은 진주 고보 사건을 접하면서부터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직시하게 되어 본격적으로 학생 운동에 뛰어들게 된다. 전사옥은 조선 식민화 교육에 반대하는 백지 동맹[시험지를 백지로 제출하는 학생들의 항일 시위] 사건으로 정학을 당했다. 또한 사회사상 연구단을 조직하여 비밀 결사 운동을 벌이다가 경찰에 체포되어 진주 형무소에서 10개월간 미결수로 구속되어 있으면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징역 1년, 집행 유예 3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전사옥은 이후 일본으로 떠나 주오[中央] 대학 전문부 법학과와 경제학부에서 유학하였다. 주오 대학에 재학 중이던 1930년대 중반부터 몽양 여운형의 지도를 받으면서 재일 유학생들을 조직화하고 항일 사상을 고취시키는 데 앞장섰다. 여운형 그룹의 핵심 인물로 활동하던 전사옥은 1941년에 귀국하여 서울 영등포 공장 지대를 중심으로 청년과 노동자 계급을 조직하여 반제국주의 사상을 지도하는 한편, 항일 지하 운동을 전개했다. 1943년 7월 경기도 양주군 봉안(奉安)에서 여운형이 ‘조선 민족 해방 연맹(朝鮮民族解放聯盟)’이라는 새로운 조직체를 결성할 때 전사옥도 참여하였으며, 이 조직은 건국 동맹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후 전사옥은 여운형의 지령을 받고 건국 동맹 산하의 비밀 결사 단체인 농민 동맹에서 활동하였다. 농민 동맹은 농민들이 주요 구성원이었지만 단순한 농민 조직이라기보다는 지하 통일 전선체로서 건국 동맹의 조직, 선전, 군사 활동을 위한 조직 거점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 위해 조직된 것이다.
조국의 해방을 맞이한 전사옥은 여운형을 따라 건국 준비 위원회에 참여하면서 청년 운동을 전담하였다. 여운형이 "청년 문제는 전사옥이 가장 잘 아니, 그에게 물어보면 된다."라고 할 정도로 청년 운동에 몰두하던 전사옥은 1945년 11월 29일 천도교 회관에서 44개 단체 대표 820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전국 청년 단체 총동맹[청총] 서울시 연맹 결성 대회에서 중앙 집행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정판사 사건의 핵심 인물로 지목되어 고초를 겪었고, 1947년 6월 제2차 미·소 공동 위원회에 청총의 대표로 참석하는 등 꾸준하게 활동을 하였으나, 그 이듬해인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거창 출신의 항일 독립운동가이자 청년 운동가인 전사옥은 엄혹한 일제 식민 지배하에서 조국과 민족 해방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며 치열하게 살았다. 국가 보훈처는 전사옥의 항일 독립 활동 사실을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정부 수립 이후의 행적과 사망 연대가 불명확하다는 것을 이유로 아직까지 공식적인 독립 유공자로 승인하지 않고 있다. 더 늦기 전에 전사옥의 항일 활동에 대한 합당한 평가와 대우가 뒤따라야 할 것이다.
[상훈과 추모]
2007년 6월 10일 전사옥의 고향인 경상남도 거창군 가북면 해평리 달밭 마을에서 전사옥을 기리는 제단비(祭壇碑) 개막식이 거행되었다. 전사옥의 최후를 확인하지 못한 관계로 묘를 쓰지 못했기 때문에 묘비가 아닌 제단비를 세운 것이다. 2019년 8월 15일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