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남식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300919
한자 崔南植
영어공식명칭 Choe Namsik
분야 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경상남도 거창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신용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20년 1월 1일연표보기 - 최남식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39년 - 최남식 양정 고등학교 졸업
활동 시기/일시 1939년 - 최남식 계림 농원 개원
활동 시기/일시 1947년 - 최남식 최남식 가옥 건축
활동 시기/일시 1965년 - 최남식 거창 원예 농업 협동조합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68년 - 최남식 경향 신문 주최 국민이 주는 상 수상
활동 시기/일시 1970년 - 최남식 대통령 산업 포장 수상
활동 시기/일시 1975년 - 최남식 전국 농촌 지도자 중앙회 회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83년 - 최남식 거창 박물관 후원회장 역임
몰년 시기/일시 2007년 3월 1일연표보기 - 최남식 사망
거주|이주지 최남식 거주지 -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정장리 978-4 지도보기
학교|수학지 양정 고등학교 - 서울
묘소 최남식 묘소 -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장팔리 지도보기 덕천 서원 맞은 편 동산
성격 농촌 계몽 운동가
성별
본관 경주
대표 경력 계림 농원 주인

[정의]

근현대 시기 거창의 농촌 계몽과 향토 문화재 보존에 기여한 선각자.

[활동 사항]

최남식(崔南植)[1920~2007]은 1920년 1월 1일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나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 거창에 정착하였다. 양정 고등학교 재학 중 교사 김교신의 영향을 받아 재학 중 브나로드 운동에 참가했고, 이광수의 “흙”, 심훈의 “상록수”의 정신에 따라 농촌 계몽 운동을 필생의 사업으로 삼았다.

졸업 후 1939년 거창군청에 근무하면서 거창읍 정장리 일대 황무지를 개간해 거창에서 처음으로 사과나무를 심어 계림 농원을 개원했다. 1942년에는 무 농사로 4,000원의 큰 수입을 올리면서 전업농이 되었다. 1943년부터 고구마 농사로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식량 증산 요원으로 일제로부터 징용, 징병을 면제받았다. 1945년 정장리로 분가하였고, 1947년엔 네덜란드 농가를 본 떠 스스로 설계한 농가[최남식 가옥. 2005년 9월 14일 등록 문화재 203호로 등록]를 지었다.

1950년대 정장리 마을에서 농촌 계몽 운동을 벌였다. 마을에 공동 이발소를 열고, 이곳을 마을 주민들의 회의 장소, 신문과 잡지를 보는 도서관, 구급약을 비치한 간이 약국으로 삼았으며, 마을에 방송 시설을 설치하고 정미소를 세웠다. 또한 공동 시설 운영 위원회를 조직하여 앰프부장, 전기부장, 정미부장, 이발부장을 두고 스스로 위원장이 되었다.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사과나무 보급에 나서 1965년 거창 원예 협동조합을 조직하고 조합장이 되었다. 1968년 경향 신문사가 주최한 제3회 “국민이 주는 상”을 수상하였고, 1970년 대통령 산업 포장을 수상했으며, 1971년에는 막사이사이상 후보에 올랐다. 1972년 거창읍 학리에 새로운 목장을 개척, 경영하였다. 1975년부터 10년 간 전국 농촌 지도자 중앙회 회장을 지냈고, 1980년대 새마을 영농 기술자 중앙회 회장, 평화 통일 자문 회의 교육 홍보 위원을 역임하였다.

향토 문화재 수집과 보존에도 힘을 쏟아 일제 강점기 때부터 도굴꾼들이 가져온 문화재를 구입·보존하였고, 1971년 거창군 남하면에서 고려 시대 둔마리 벽화 고분[1974년 9월 5일 사적 제239호로 지정]를 발견하였다. 1983년 수백 점의 문화재를 거창군에 기증하였고, 거창 박물관 후원회 회장으로 1988년 거창 유물 전시관[현재 거창 박물관] 개관에 기여하였다. 1990년대에는 거창 유물의 도굴을 막기 위해 ‘노인 파수대’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이러한 공로로 1993년 경상남도 문화상을 수상하였다. 최남식은 2007년 3월 1일에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최남식은 경향 신문사 주최 제3회 ‘국민이 주는 상’과 대통령 산업 포장을 수상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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