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3009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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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潑 |
영어공식명칭 | choibal |
이칭/별칭 | 양지당(養志堂) |
분야 | 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경상남도 거창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태성 |
[정의]
조선 후기 거창 출신의 효자.
[개설]
최발(崔潑)[?~?]은 정유재란 때 여든 살이 넘은 아버지를 업고 피난하다 왜적을 만나자 곧은 절의로 왜적에 대항하다가 아버지를 안은 채 순절한 효자이다.
[가계]
최발(崔潑)의 본관은 화순(和順)이며, 조선 세종(世宗)~세조(世祖) 때의 문신으로 공조 판서(工曹判書)를 지낸 문혜공(文惠公) 최선문(崔善門)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참봉을 지낸 최응복(崔應福), 어머니는 진주 정씨(晋陽鄭氏)이다. 화순 최씨(和順崔氏)의 시조는 고려 시대에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최세기(崔世基)이다. 최세기가 전라도 화순의 옛 이름인 오산(烏山)군에 봉해짐으로써 화순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그 사이에 이어진 세대는 불분명하다. 거창의 화순 최씨 입향조는 남하면 사우당의 최세식(崔世湜)이 월곡으로 이거하였고 북상면에 최문엽(崔文燁)이 함양에서 강선동으로 이거했다는 『거창군사』의 기록이 유일하다. 최발은 현재 남하면 무릉리 월곡 마을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화순 최씨 일족일 것으로 추정된다.
[활동 사항]
최발은 타고난 성품이 성실하며 지극히 효성스러웠다고 한다. 정유재란 때 아버지를 업고 피난을 하다 왜적에게 잡혔다. 아버지가 적을 꾸짖으며 굴복하지 않자 적이 화가 나서 부자의 혀를 자르고 몸을 불태워 냇물의 소에 던졌다. 나중에 시신이 떠올랐는데 서로 껴안고 있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그 소를 ‘부자연(父子淵)’이라고 하였다. 이곳은 합천호 건설로 수몰되었고 부자정과 정려는 합천군 봉산면 상현리로 옮겼다.
[상훈과 추모]
1600년(선조 33)에 최발을 예조 판서에 추증하고 정려를 내렸다. 문위(文緯)가 쓴 정려기(旌閭記)가 있으며 서애 유성룡이 쓴 다음과 같은 만(挽)이 전한다. “萬古倫綱曰孝忠 危場不避蹈兇鋒 厝薪寧可鋒于火 投水猶能拯 以風筍鯉感誠聞俗說 熊魚取義見眞功 嗟嗟 至行言無間 生卽相扶死亦同[만고의 강상은 충효이니 위기를 당하여 흉적의 칼날을 피하지 않고 섶에서도 오히려 불보다 날카롭고 물에 던져도 오히려 떠올랐다. 풍화로 죽순이 돋고 잉어가 뛰어나오는 이적을 남겼으니 웅장과 물고기 둘 다를 취하지 못하면 웅장을 취하고 삶과 의를 모두 취할 수 없으면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하여 참된 공을 드러내었다. 아아 지극한 언행은 언제나 일치하니 살아서도 서로 지탱하고 죽어서도 또한 그와 같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