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3010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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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陰石傳說 |
영어공식명칭 | Eumseok jeonseol |
이칭/별칭 | 음석 바위 전설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경상남도 거창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조현영 |
채록|수집|조사 시기/일시 | 1978년 7월 31일 - 「음석 전설」 채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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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간행 시기/일시 | 1997년 - 「음석 전설」, 『거창군사』에 수록 |
수록|간행 시기/일시 | 2013년 - 「음석 전설」, 『거창 전설』에 수록 |
수록|간행 시기/일시 | 2013년 - 「음석 전설」, 『서부 경남의 전설』에 수록 |
관련 지명 | 양평리 -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양평리 |
채록지 | 「음석 전설」 채록지 -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양평리 |
성격 | 설화 |
주요 등장 인물 | 거창 신씨|도승 |
모티프 유형 | 풍수담 |
[정의]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양평리에서 거창 신씨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음석 전설」은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양평리에 있는 돌무덤과 거창 신씨와 관련된 명당 풍수담이다.
[채록/수집 상황]
「음석 전설」은 1978년 7월 31일 박종섭이 거창군 거창읍 양평리에서 이기윤[여, 57세]에게 채록했다. 1997년 거창군에서 발행한 『거창군사』, 박종섭 편저로 2013년 사단 법인 향토 민속 보존 협의회에서 간행한 『거창 전설』, 박종섭 편저로 문창사에서 간행한 『서부 경남의 전설』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양평리에는 돌을 쌓아 올려서 경주의 첨성대 모양으로 만든 큰 돌무덤이 있다. 1980년에 양평리의 주민 신종옥[남, 당시 61세]이 만든 것이다. 이 장소에는 옛날에 거대한 바위가 있었는데, 이 바위의 그늘이 마을을 덮었다고 한다. 그래서 양평의 옛 이름은 그늘이 진다고 하여 그늘뜰, 그느뜰, 그네뜰, 가네뜰로 불리워 왔다고 한다. 또는 그늘을 만드는 바위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음석(陰石)’이라고 했다고 한다. 옛날부터 이 마을에는 거창 신씨가 살았다. 거창 신씨는 연산군의 비와 중종의 비가 배출된 집안으로 그 위세가 대단했다. 「음석 전설」은 거창 신씨와 관련된 이야기이다.
옛날 양평 마을에 살던 거창 신씨는 위세가 대단해서 안하무인이었다. 조선 시대는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하던 시절이라 중들에 대한 멸시와 학대가 심했다. 거창 신씨도 마찬가지로 시주를 받으러 온 중들을 곱게 대접하지 않았다. 마을 옆에 절이 있었는데, 이 절의 중들도 마을에 시주를 받으러 올 때 거창 신씨들에게 봉변을 많이 당했다. 그래서 이 절의 중들은 양평 마을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절에 머물던 도승이 거창 신씨들의 행패를 듣고 버릇을 고쳐 주기 위해 양평 마을을 일부러 찾아갔다. 도승은 거창 신씨 문중 중 가장 높은 대문이 있는 집 앞에서 불경을 외웠다. 그러자 거창 신씨 집안의 하인들이 도승을 잡아 끌고는 형틀에 묶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도승은 버티고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도승의 눈빛은 보통이 아니었다. 도승의 위세에 눌린 하인들이 당황해 있는 사이, 도승은 집주인을 만나게 해 달라고 했다.
도승을 본 거창 신씨는 도승에게서 범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고 무슨 일로 자신을 만나자고 했는지를 물었다. 도승은 거창 신씨가 마을 앞의 음석의 보호로 지금까지 부귀영화를 누렸다고 하며, 이제 음석의 영험이 다 되어서 하루아침에 거창 신씨 집안이 망할 것이라고 말했다. 신씨는 현재 왕인 연산군의 비가 거창 신씨이고, 좌의정, 형조 판서 등과 같은 고관대작들이 집안에 있는데 망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자 믿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도승은 음석을 없애야만 거창 신씨 집안이 계속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을 것이라 했다. 거창 신씨는 문중회를 열어 회의를 한 결과 음석을 없애기로 결정했다. 36척(尺)[약 10m]이나 되는 높은 바위를 없애는 일은 쉽지 않았다. 몇 해에 걸쳐 음석을 없애는 작업을 하던 중 음석 바위의 마지막 뿌리가 없어질 때 밑둥치 속에서 흰빛을 발하는 새가 세 마리 날아 나왔다. 세 마리의 새는 뿌리째 뽑혀 없어진 음석 바위 주변을 몇 바퀴 맴돌다가 슬픔 울음을 남기고 사라졌다. 한 마리는 양평 마을 거창 신씨들의 선산이 있는 동변리 구산으로 날아가고, 한 마리는 거창군 위천면 황산 마을의 거창 신씨 선산인 생림재 쪽으로 날아갔으며, 한 마리는 날개를 떨구고 아래로 떨어져 무너진 음석의 바위틈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한편 음석이 파괴되는 순간 양평 마을에서 4㎞ 떨어진 거창군 남하면 양곡 마을 앞에 솟아 있는 양석이 번개에 맞아 깨어져 평평해졌다고 한다. 음석이 없어지고 나서 몇 년 후 중종반정(中宗反正)[1506]이 일어나고 그때까지 세도를 누리던 거창 신씨 집안은 하루아침에 몰락하고 말았다. 연산군의 비인 신씨는 물론이고 반정을 준비한 중종의 비 신씨 또한 아버지 신수근이 역적으로 몰리자 폐출되었다. 음석 바위 뿌리를 뽑아 없애 버릴 때 나온 새가 거창군 위천면 황산으로 날아갔기 때문에 지금도 황산 마을의 거창 신씨 문중에서는 인물이 많이 배출되고, 날개를 늘어뜨리고 음석으로 떨어진 새는 영험이 없어진 것이기 때문에 양평 마을의 거창 신씨 문중에서는 그 후 뛰어난 인물이 배출되지 않았다고 전한다. 음석이 없어지고 난 후 이 마을은 이름이 양평으로 변했다.
[모티프 분석]
「음석 전설」은 명당 풍수담을 주요한 모티프로 한다. 풍수담은 수용자에 관한 이야기, 풍수에 관한 이야기, 명당에 관한 이야기로 하위 갈래를 규정할 수 있다. 이 중에서 「음석 전설」은 명당에 관한 이야기 중 ‘명당 깨트리기’로 볼 수 있다. 명당을 파손하는 까닭은 주로 금기를 깨트리는 것에 있다. 그러나 「음석 전설」에서 명당을 파손하는 까닭은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을 응징하기 위한 것이다. 이야기에 주요한 등장인물인 도승이 음석 바위 때문에 거창 신씨가 그동안 부귀영화를 누렸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양평 마을은 명당이다. 그러나 거창 신씨가 그 마을의 세도가로서 안하무인의 행동을 일삼고 승려들을 박대하는 것으로 나온다. 이러한 거창 신씨를 응징하기 위해 도승은 거창 신씨의 부귀영화의 원천인 음석 바위를 없애도록 유인한다. 결국 거창 신씨들은 명당의 자리에 있는 음석 바위를 없앤 이후에 집안이 몰락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