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3010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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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孝婦碑 |
영어공식명칭 | hyoeububi |
이칭/별칭 | 월평리 김효부비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경상남도 거창군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원은희 |
채록|수집|조사 시기/일시 | 1976년 7월 23일 - 효부비 채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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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간행 시기/일시 | 1997년 - 효부비, 『거창군사』에 수록 |
채록|수집|조사 시기/일시 | 2016년 8월 - 효부비 채록 |
관련 지명 | 월평리 - 경상남도 거창군 남상면 월평리 |
채록지 | 월평 경로당 - 경상남도 거창군 남상면 월평리 |
성격 | 설화 |
주요 등장 인물 | 며느리|남편|시아버지|승려 |
모티프 유형 | 효부 설화 |
[정의]
경상남도 거창군 남상면 월평리에 있는 효부비에 관한 이야기.
[개설]
경상남도 거창군 남상면 월평리에 있는 효부비는 전쟁에 남편을 잃고 시아버지마저 병이 들자 자신의 발가락을 잘라 봉양한 며느리의 효행을 후세에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부모의 치병을 위해 헌신적인 효를 실천한 며느리에게 효부비를 내려 포상함으로써 효의 중요성을 강조한 당시의 유교 사상을 엿볼 수 있다.
[채록/수집 상황]
『거창군사』에 기록된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2016년 8월 경상남도 거창군 남상면 월평리 경로당에서 이장 김경옥[남, 70대 초반]에게 효부비에 얽힌 내용을 확인하였다.
[내용]
월평리에는 풍우에 이지러진 효부비 한 기가 지금은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외롭게 서 있다. 이 효부비에는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어 뭇사람들에게 잊혀져 가는 효에 대한 참다운 정신을 일깨워 주고 있다.
옛날, 이 마을 뒤편 산속 외딴곳에 부부가 연로한 아버지와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밤이 되면 고요한 적막 가운데 밤바람에 나뭇잎이 부딪는 소리가 들리고 멀리서 짐승들의 울음소리도 들려오는 곳이었다. 행복하고 평화롭던 이 가정에 불행의 그림자가 찾아온 것은 전쟁 때문이었다. 나라에 전쟁이 일어나자 남편은 마을의 다른 장정들과 같이 출병을 하게 되었다. 이별의 슬픔이 감깐 있기는 했으나 아내는 남편이 꼭 살아 돌아올 것을 믿었고, 시아버지를 정성껏 모시며 전보다 더 부지런히 농사일을 하며 지냈다. 그러나 전쟁에 나간 남편으로부터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고, 2년이라는 세월이 훌쩍 흘러갔다. 아내에게 그 세월은 기다림과 애태움의 연속이었고, 절망과 희망이 수십 번 교차되는 시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는 남편의 전사 소식을 듣게 되었다.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접한 아내는 절벽 위에서 거꾸로 떨어지는 듯한 절망감을 느꼈다. 어려운 살림살이를 이어 나갈 길도 막막했다. 그러나 아내는 남편을 잃은 슬픔을 털고 남편의 몫까지 해서 모셔야 할 시아버지가 있다는 현실을 생각했다. 아내는 슬픔을 안으로 삼키고 시아버지를 봉양하며 어렵사리 살아갔다.
이듬해 봄이 되어 다시 바쁜 농사철이 돌아오자 며느리와 시아버지는 몇 평 되지 않는 전답에 매달려 열심히 일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밭을 가는 시아버지의 쟁기에 몇백 살 먹은 듯한 뱀의 꼬리가 잘리어 나오더니 땅속으로부터 피가 솟구쳐 올랐다. 이를 본 시아버지는 곧 혼절하고 말았다. 갑자기 당한 일에 며느리는 어리둥절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으나, 정신을 가다듬고 시아버지를 집으로 옮겨 정성껏 간호했다. 그러나 며느리의 정성 어린 간호도 별 효과 없이 그때부터 시아버지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더니 곧 거동을 못하게 되었고, 다리까지 점점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며느리는 온갖 정성을 다하여 간호했다. 가난한 살림이지만 약값을 마련하여 좋다는 약을 다 써 보았으나 시아버지의 다리는 더 심각해져 갈 뿐이었다. 며느리는 뒷산 골짜기에 맑은 물을 떠 놓고 부처님께 불공을 드리기 시작했다. 어떤 희생도 감수할 터이니 시아버지의 다리만 완쾌되게 해 달라고 진심으로 불공을 드렸다. 며느리의 정성에 부처님도 감동하였는지 어느 날 며느리는 한 꿈을 꾸게 되었다. 꿈에 승려가 나타나서 "너의 정성에 감복하여 시아버지의 병이 나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겠다. 그러나 이것은 정말 어렵고 힘든 일이라 네가 해낼지 의문이다. 왜냐하면 너의 다섯 발가락을 잘라서 달여 먹여야 시아버지의 병이 나을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고서는 홀연히 사라졌다. 잠에서 깬 며느리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꿈이었지만 너무나 생생했다. 날이 밝자 며느리는 몇 번을 망설이다가 꿈속에서 승려가 일러 준 대로 자기의 다섯 발가락을 잘라서 시아버지에게 달여 드렸다. 이것을 마신 후 시아버지의 썩어 가던 다리는 거짓말처럼 깨끗해지고 전처럼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뒷날 이 소문이 온 동네에 퍼졌고, 며느리의 효심은 후세에까지 전해졌다. 그리하여 며느리의 착한 마음씨를 기리기 위하여 이 마을에 효부비를 세웠다 한다.
[모티프 분석]
월평리에 남아 있는 효부비에 전해지는 이야기는 전쟁에 남편을 잃고 홀로 시아버지를 봉양하던 며느리가 자신의 다섯 발가락을 잘라 시아버지의 병을 치료했다는 효행 설화를 모티프로 하고 있다. 효행 지선(孝行至善)의 세계관이 반영되어 있는 효부비를 통해 개인의 주체적 삶보다 남편과 시댁을 위하는 것이 당시 여인들의 삶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가족의 병 치료에서도 극단적인 희생이 드러나는데, 이는 우리 역사, 특히 조선 시대의 유교 윤리의 일면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온 결과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