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3010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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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牛頭山- |
영어공식명칭 | A Tale of Udusan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경상남도 거창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종순 |
수록|간행 시기/일시 | 1997년 - 「우두산 이야기」, 『거창군사』에 수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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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지명 | 우두산 -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 수월리 |
채록지 | 「우두산 이야기」 채록지 - 경상남도 거창군 |
성격 | 전설 |
주요 등장 인물 | 일본 개국신 |
모티프 유형 | 지명 유래담 |
[정의]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에 있는 소머리 형상의 우두산과 관련된 이야기.
[개설]
경상남도 거창군의 가조면과 가북면에 걸쳐 있는 우두산은 별유산, 의상봉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의상봉(義湘峰)[1,046m]은 우두산(牛頭山)의 아홉 봉우리 중의 하나일 뿐이다. 우두산의 지명은 산의 형세가 소머리를 닮았다는 데서 유래하였다는 설이 있다. 또한 이백(李白)의 「산중문답(山中問答)」에 나온 구절인 ‘별유천지 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에서 이름을 따 별유산이라고 하였으며, 산의 봉우리 중 하나인 의상봉을 산 전체의 이름으로 인식했다고도 전한다. 『한국의 산지』에는 의상 대사가 참선한 곳이라고 하여 의상봉이라 하였다고 수록되어 있다. 또한 우두산에는 일본 개국 신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채록/수집 상황]
1997년에 거창군사 편집 위원회가 편찬한 『거창군사』에 수록되어 있는데, 일본 개국 신화와 관련한 부분은 김태순으로부터 채록한 것이다.
[내용]
일본 옛 역사 서적인 『일본서기(日本書紀)』나 『고사기(古事記)』에는 스사노 노미코토[須佐之男命], 일명 우두 대왕(牛頭大王)이라고 불리는 신에 관한 대목이 있다. 일본 창조신 이사나기 노미코토[伊邪那岐命]의 코에서 태어나 바다와 폭풍을 다스렸다는 우두 대왕은 아주 거칠고 반항적인가 하면 창의력이 있고 개척 정신도 왕성한 남신이다. 우두 대왕은 천상계를 다스린 그의 여자 형제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의 노여움을 사서 아들 이소다케루 노미코토[五十猛神]를 데리고 신들의 땅인 다카마가 하라[高天原]에 내려와 살았다. 다카마가 하라에서도 행실이 좋지 않다 하여 신라의 소시모리[會戶茂梨]로 쫓겨난 우두 대왕은 그곳에서 많은 나무의 씨앗을 가지고 흙으로 빚은 배를 타고 고미나리[熊成]를 통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신라는 처음 나라 이름을 서라벌, 서라, 사로, 계림으로 불렀고 228년에 신라로 고쳐 지었는데, 『일본서기』나 『고사기』의 기록에 ‘신라’라고 표기된 것을 보면 우두 대왕은 3세기 이후의 실존 인물이나 집단이고 신라와 이웃한 가야국 가운데 어느 나라의 존재로 보인다. 신라의 ‘소시모리’는 이두식 음독 문자에 의한 것인데, 소의 머리를 의미한다. ‘우두 대왕’이라는 별명은 우두산에 살던 대왕을 가리키는 것이다. ‘고미나리’는 곰나루, 즉 웅진 또는 웅천을 뜻한다. 경상남도 거창군의 가조면과 합천군의 숭산리 사이를 가로막은 가야산 지맥에 우두산이 있다. 우두산은 거창의 옛 읍지와 『대동여지도』에도 명시되어 있다. 또 남해안에 있는 창원의 웅천까지는 일찍부터 길이 트여 있었는데, 웅천 자체가 예로부터 일본 교류의 접점이었다. 일본이 한국을 탐방하고 황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한일 동근 동조론(韓日同根同祖論)’을 외칠 때 스사노 노미코토가 우두산이 있는 옛 우수주(牛首州)인 춘천에서 머물다가 배를 타고 금강에서 서해안을 통해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풀이하고 춘천에다 신궁(神宮)을 세우려고 했다. 최근 일본의 고대 한래 문화(古代韓來文化)를 연구하는 이기동은 『고천원은 조선인가』라는 저서에서 우두 대왕은 과거 일본 사람들이 말하듯이 춘천→금강→서해안→일본에 이르는 멀고도 험한 길이 아니라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거창의 우두산에서 창원의 웅천을 거쳐 거제도→대마도→이키 섬→일본으로 가는 가깝고도 순탄한 길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일본 창건 신이며 일본 황실의 조상들이 살던 다카마가 하라[高天原]를 바로 거창의 가조 분지에다 비정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3세기경의 이 지방에 살던 변한계의 가야족 가운데 유력한 한 집단이 신라와 백제의 세력에 밀리어 내분이 일어나자 그 일부가 남천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새 터전을 개척한 것이 아닌가 추측되기도 한다.
[모티프 분석]
일본 역사서 『일본서기』와 『고사기』 등에는 일본 개국신 스사노 노미코토가 터를 잡은 땅이 언급되어 있는데, 이 땅이 일본이 아니라 신라의 ‘소시모리’라는 곳이라고 한다. 소시모리에 살던 개국신 스사노는 동해를 건너 일본 이즈모[出雲]에 정착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일본 최고의 역사서가 전하는 일본의 탄생이다. 그런데 이 신화에 등장하는 소시모리, 즉 신들의 고향 다카마가 하라를 이경희 전 가야 대학교 총장은 가야 땅 우두산이라고 밝히고 있다. ‘소시모리’의 이두식 표기가 ‘소머리’ 이며, 이는 대가야 땅 ‘우두산’을 일컫는다는 것이다. 일본의 언어학자 고 마부치 가즈오[馬淵和夫] 교수가 이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를테면 일본의 개국신과 신화의 고향은 거창의 우두산이라는 말이다. 한편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서기』에 기록된 ‘소시모리’가 어디인가를 비정하는 일은 ‘한일 동근 동조론’과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기조 안에서 큰 과제였다. ‘소시모리’를 ‘소의 머리’로 언어학적으로 해결한 일본은 그것의 한자 표기인 ‘우두(牛頭)산’을 찾아나섰다. 그런데 우두라는 이름이 조선 전국에 여러 곳이 존재하였기 때문에, 경주설, 가야설, 춘천설로 해석이 되다가 1930년대 후반에 일제의 신사 정책의 강화 속에서 춘천 우두산에 소시모리 신사를 건립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해방 후 춘천에서는 소시모리 신사가 일제의 통치를 위한 선전에 불과했다는 데 의견 일치를 보고 신사의 해체와 지역 문화 복원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후 경상남도 거창에서는 이와는 다른 각도에서 거창 지역이 바로 일본 신들의 ‘본향’이라는 새로운 해석이 등장하였다. 거창군 가조를 바로 일본 신들의 고향인 다카마가 하라로 해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