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3010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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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安陰縣 |
영어공식명칭 | Aneumhyeon |
이칭/별칭 | 마리현(馬利縣),이안현(利安縣)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경상남도 거창군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고려/고려 전기,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배상현 |
[정의]
경상남도 거창군 마리면과 함양군 안의면 일대에 있었던 통일 신라 시기부터 조선 시대까지의 지명.
[개설]
안음현(安陰縣)은 오늘날 경상남도 거창군 마리면과 함양군 안의면 일대에 있던 통일 신라 시기부터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까지의 지명이다. 신라 시기 마리현(馬利縣)으로 불렸는데 고려 시대에 들어와 합주(陜州)에 속하게 되었고 조선 초에 안음현으로 고쳐 불리게 되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왜적에게 붙들려 간 아버지를 구출한 효자 반전(潘腆)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고려 말 감음현(感陰縣)에 이속되었다.
[관련 기록]
『고려사(高麗史)』 권121, 열전 효우(孝友)편에 효자 반전에 대한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전한다.
"반전은 안음현 사람으로 산원(散員) 벼슬로 향리에 머물고 있었는데, 1388년(우왕 14) 왜적이 갑자기 들이닥쳐 그의 아버지를 잡아 갔다. 반전은 은덩어리[은정(銀錠)]와 은띠[은대(銀帶)]를 가지고 적진 가운데로 들어가 아버지를 돌려 보내어 줄 것을 간절히 요청하였다. 이에 왜적이 의롭게 여겨 허락하였다."
『고려사(高麗史)』 권57, 지리2 경상도 합주 이안현조에 "이안현(利安縣)은 본디 신라의 마리현으로 경덕왕(景德王) 때 지금 이름으로 고쳐 천령군(天嶺郡)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1018년(현종 9)에 [합주에] 내속(來屬)하였다. 1390년(공양왕 2) 감음(感陰)으로 옮겨 소속되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세종실록(世宗實錄)』 권150, 지리지 경상도 진주목 안음현조에 "이안현은 본디 마리현인데 경덕왕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천령군의 영현을 삼았다. 감음현은 본디 남내현(南內縣)인데 경덕왕이 여만(餘萬)으로 이름을 고쳐서 거창군(居昌郡)의 영현을 삼았다. 고려조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현종 무오년(1018)에 모두 합주(陜州) 임내(任內)에 붙였다. 공양왕 경오년에 감무(監務)를 두고 이안현을 이에 붙였는데 본조 태종 17년(1417) 정유에 두 현의 이름을 따서 안음현으로 고쳤다."라는 기사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31, 경상도 안음현 건치 연혁조에는 "이안현은 본래 신라 마리현이다. 경덕왕이 이안현이라 고쳐서 천령군 속현으로 만들었다. 고려 현종 9년(1018)에는 합주에 이속시켰고, 공양왕 때에는 감음에 이속시켰다. 감응현(感應縣)은 본래 신라 남내현이다. 경덕왕이 여선(餘善)이라 고쳐서 거창군 속현으로 만들었다. 고려 초에 감음이라 고쳤고, 현종 9년(1018)에는 합주에 이속시켰다. 의종(毅宗) 15년(1161) 현 사람 자화(子和) 등이, 정서(鄭叙)의 아내가 현 아전 인량(仁梁)과 함께 임금과 대신을 저주한다는 내용으로 무고하였으므로, 자화는 강 복판에다 던지고 현은 강등시켜 부곡(部曲)으로 만들었다. 공양왕이 다시 감무를 두고 이안현을 내속시켰다. 본조 태종조에 관아를 이안에 옮기고, 지금 명칭으로 고쳐서 현감으로 하였다."라고 기술하였다.
[변천]
안음현은 신라 시기 마리현으로, 경덕왕이 이안현이라 개칭하여 천령군의 영현으로 삼았다. 1018년 합주에 속하게 하였다가 다시 1390년 감음현에 이속되었다. 감음현은 신라 때 남내현이었는데 경덕왕이 여선현(餘善縣)으로 고쳐 거창군의 영현이 되었다. 고려 초 감음으로 고치고, 1018년 합주의 속현이 되었다. 감음현은 1161년 현의 자화 등의 무고 사건이 일어나 강등되어 부곡이 되었다. 1390년 복구되어 감무가 파견되고 이안현에 속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