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3013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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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也里 |
영어공식명칭 | Daeya-ri |
이칭/별칭 | 대바지,대야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경상남도 거창군 남하면 대야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홍수 |
[정의]
경상남도 거창군 남하면에 속하는 법정리.
[개설]
대야리(大也里)는 경상남도 거창군 남하면의 남쪽에 있다. 대야(大也)·오가(五可)·용동(舂洞)·가천(加川) 등 4개의 자연 마을을 관할하고 있다.
[명칭 유래]
마을 뒤에 대밭이 있어 ‘대바지’라고도 하며 뒷산이 "잇기 야[也]" 자 같아서, 또는 냇가에 대장간이 있어서 "풀무 야(冶)" 자를 써서 ‘대야(大冶)’ 또는 대바지의 "바" 자를 아(雅)로 써서 ‘대아(大雅)’라고도 하였다. 옛날 거창 원님이 대바지 무우 맛에 반하여 마을 뒷산인 사임산을 감투봉[감토산]이라 이름 붙였다는 말이 전해진다. 오가는 다섯 번은 피난할 수 있는 곳이라 ‘오가리’라고도 한다. 한 도사가 나라 안 사람이 사흘 먹을 것이 있다고 하였는데 과연 이곳 금광에서 많은 금이 나왔다고 한다. 용동은 마을 뒷산이 풍수에서의 ‘방아공이’ 설이라 하고, 마을 근처에 방앗간이 있어 ‘방앗재’라고도 한다. 가천은 가천 냇가 산기슭 개천이 골짜기의 가장 안쪽에 있으므로 ‘안개천’ 이라고도 한다.
[형성 및 변천]
본래 거창군 무등곡면 지역으로 대바지 또는 대야라고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가천동과 합천군 봉산면의 가천동 일부를 병합하여 대야리라 하고 남하면에 편입되었다.
용동은 진양 정씨가 마을을 열었다고 전해진다. 가천은 1597년 정유재란 때 추사용(秋史庸)이 영월에서 옮겨 와 마을이 시작되었다 한다.
[자연환경]
대야리는 황강 주변과 황강으로 유입되는 하천의 하곡을 따라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대야리의 서쪽은 감투산을 뒷산으로 하는 대야 마을이 황강 변에 있고, 중앙은 무릉리에서 지산리로 통하는 고개인 빼재에서 발원한 개천 주변에 오가 마을이 있다. 대야리의 동쪽은 가조면에서 남류하여 황강으로 유입되는 가천천을 따라 가천 마을이 있다. 산지가 많고 농경지가 협소한데, 농경지는 주로 황강 주변과 가천천을 따라 발달되어 있다.
[현황]
2015년 12월 현재 전체 면적은 11.38㎢으로 이 중 대부분이 임야 8.44㎢이다. 논 0.3㎢, 밭 0.37㎢, 과수원 0.07㎢, 대지 0.13㎢ 등의 토지 이용 현황이 나타난다. 합천댐의 건설로 황강 주변의 많은 농경지가 수몰되었다.
2016년 4월 30일 현재 대야리의 인구는 101세대 194명[남자 94명, 여자 100명]이고, 남하면에서 가장 적다. 대부분의 주민들이 농업에 종사하며 주로 벼농사를 하고 있다.
합천댐의 상류 지역인 대야리는 남쪽의 황강 연안을 따라 고령·거창을 연결하는 국도 4호선가 통과하고 있으며, 주요 문화재로는 삼우당[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155호], 입암정(立岩亭), 오가재(五加齋), 대아 서당(大雅書堂) 등과 대야리 선사 시대 주거지 유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