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600551 |
---|---|
이칭/별칭 | 지석묘,대개석묘,거석 기념물,돌멘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시대 | 선사/청동기,선사/철기 |
집필자 | 강창화 |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 지역에서 거대한 돌을 이용해 만든 선사 시대의 무덤.
[개설]
고인돌은 거대한 돌을 이용해 만든 선사 시대 거석 기념물의 일종으로, 한국에서는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묘제이다. 고인돌은 대부분이 묘제이지만 일부는 집단의 의식 장소나 의식을 행하는 제단[기념물]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한국에서는 ‘고인돌’, 일본은 ‘지석묘(支石墓)’, 중국에서는 ‘대개석묘(大蓋石墓)’라 하고, 유럽에서는 대체로 ‘거석 기념물’ 또는 ‘돌멘(Dolmen)이라고 부른다.
고인돌의 일반적인 정의는 땅속이나 땅위에 돌로 무덤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한 덮개돌을 올려놓은 무덤을 말한다. 우리나라 고인돌의 형식은 크게 북방식·남방식·개석식 고인돌로 분류되고 있다.
북방식(北方式) 고인돌은 ‘탁자식’이라고도 불려진다. 네 개의 판석을 세워서 장방형 돌방을 만든 후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돌을 뚜껑돌로 올려놓은 형식으로 유해가 매장된 돌방이 지상에 노출되어 있는 점이 특징적이다. 남방식(南方式) 고인돌은 ‘바둑판식’이라고도 불리며, 판석·할석·천석 등을 사용하여 지하에 돌방을 만들고 뚜껑돌과 돌방 사이에 3, 4매의 받침돌이 있는 형식이다. 보통 매장 유해가 묻힌 곽을 덮는 뚜껑돌이 있는 것이 보편적이다. 개석식(蓋石式) 고인돌은 뚜껑돌과 각종 지하 돌방 사이에 받침돌 없이 뚜껑돌로 직접 돌방을 덮고 있는 형식이다. ‘무지석식(無支石式)’이라고도 불리며 크게는 남방식 고인돌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분류 기준을 그대로 제주 고인돌에 적용하기는 곤란한 실정이다. 한반도 고인돌의 형식 분류와는 시기적·형태적으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내용]
1. 형식
이청규의 제주도 지석묘 형식 분류안과 편년 체제를 그대로 따르면, 제주도 고인돌의 형식은 크게 매장부의 위치와 지석의 고임 방식을 큰 분류 기준으로 삼고 있다. 형식 분류의 기준이 되는 매장부의 위치는 시신을 지하에 매장하는가, 아니면 지상에 매장하는가에 있다. 이는 지석묘의 축조에 있어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이다.
지상형은 키가 높은 지석을 사용하고 지하형은 키가 낮은 지석을, 그리고 반지상형의 경우는 상석 양 모서리에 작은 지석을 고여 아치 모양을 이루거나, 때로는 지석 자체가 한쪽은 키가 높고, 다른 쪽은 낮은 지석을 필요로 한다. 또 하나의 분류 기준이 되는 지석의 고임 상태는, 바꾸어 말하면 상석을 올리는 방식이 된다. 매장 시설 상부에 지석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른 구분이다. 괴었다면 판석형 지석이냐 아니면 괴석형 지석이냐도 중요한 요소가 된다. 즉, 두꺼운 괴석 위에 상석을 올리는 것보다 키가 높은 판석위에 상석을 올리는 것이 보다 복잡한 축조 과정을 필요로 한다. 이와 같이 지석의 고임 상태와 매장 시설의 위치를 기준으로 제주도 고인돌을 분류하면, 대체로 여섯 가지 형식으로 구분될 수 있다.
제1형식은 지석 없이 상석이 지표에 바로 닿는 개석식 혹은 무지석식 고인돌이다. 제2형식은 남방식 유형에 속하나, 앞서 설명한 전형적인 남방식에 비해 지석 대부분을 제대로 다듬지 않은 할석을 사용하였다. 또한 지석의 숫자는 3~10매로 그 예가 다양하다. 제3형식은 상석 한쪽이 들리어 하부 매장부가 지상에 드러나 있고, 그 좌우와 들리지 않은 뒤쪽에 지석이 고인 형식이다. 들린 부분의 모양은 대체로 아치형을 취하고 있다. 제4형식은 지석이 이중으로 고인 형식이다. 비탈면을 이용하여 한쪽은 작은 할석이 받쳐져 있다. 제5형식은 비탈면을 이용하여 높은 곳은 할석과 괴석을, 낮은 곳에는 판석을 고인 형식이다. 마지막 제6형식은 상석 밑을 완전하게 판석형 지석으로 에워싸 고여 있는 형식으로 언뜻 보기에는 지상에 장방형 혹은 원형의 석실을 만든 형식이다. 이 고인돌은 용담동 6호, 광령리 4호가 대표되며 일명 ‘제주도식 고인돌’이라 한다.
대체로 제1, 2형식은 매장부의 위치가 지하에 있는 지하형이며, 제3, 4, 5형식은 축조된 지형과 축조 방법으로 보아 반지상형일 가능성이 많으며, 마지막 제5, 6형식은 지상형으로 정리된다.
2. 축조 시기
고인돌의 축조 시기를 가늠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이 묘제가 축조될 당시와 관련된 부장 유물이 중요한 단서가 된다. 한반도 육지부 지역 고인돌의 출토 유물은 마제 석검과 비파형동검, 세형동검이 있고, 또 홍도와 무문 토기 등이 출토된다. 이러한 유물은 그 연대가 대체로 청동기 시대에서 초기 철기 시대까지로 편년되고 있다. 그러나 제주도의 경우 시기적으로 앞선 유물이 출토되지 않아 다소 후행할 것으로 판단된다.
지하형인 제2형식의 고인돌에서 출토되는 토기 중에는 대체로 곽지리식 토기에 속하는 것은 있어도 회색 경질 토기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그리고 직립 구연 발형 토기 구연부가 제3형식의 고인돌인 광령리 23호 고인돌에서 비교적 많이 출토되었다. 직립 구연 발형 토기는 곽지리식 토기와 공반되나, 곽지 패총 2지구 제3층 아래층에서 초기 철기 시대 순수 구멍무늬 토기와 동반 되어 출토되므로, 보다 이른 단계의 것일 가능성이 있다. 용담동 무덤의 남쪽 묘역에 있는 돌덧널무덤에서 무문 토기가 출토되었는데, 그 돌덧널무덤이 원래 상석이 있는 제1유형인 개석식 고인돌일 가능성이 있거나, 아니면 고인돌과 같은 단계에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다시 말해, 제주도 고인돌의 축조 상한을 초기 철기 시대까지 올려 볼 수도 있다. 거의 대부분이 곽지리식 토기가 공반하므로 제주 고인돌의 축조 시기가 곽지리식 토기 사용 시기와 맞물림은 분명하나, 제5, 6형식의 고인돌에서는 적어도 3세기 초반 이후의 회색 경질 토기가 출토되므로 지상형 제주도식 고인돌이 보다 늦은 단계의 것으로 이해된다.
3. 성격
이러한 고인돌의 축조는 다수의 인원 동원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피장자의 위치를 해석할 필요성이 뒤따른다. 다수의 인원 동원 능력은 일정한 권위에 의해서 강제된 것이다. 반대로 자발적인 협업 체제에 의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전자의 입장은 고인돌의 피장자는 우월한 지위에 있는 족장(族長) 혹은 수장(首長)이라는 해석이 될 수 있으며, 후자의 입장에서는 모든 피장자가 우월한 지위에 있는 족장으로 보기 어렵다는 견해이다.
제주도 내 고인돌의 축조 기간을 탐라 전기로 잡고 마을 구성원의 모두 고인돌 묘제를 채택했다면 그 수는 실로 엄청날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고인돌의 분포가 한정적이고 밀집된 곳이라도 10~20여기에 불과하므로, 고인돌 피장자는 적어도 마을 구성원 중 일정한 지위에 있는 신분임은 분명하다.
제주도 고인돌 중 가장 발전한 판석 모양 지석을 가진 제6형식은 제주도에서만 볼 수 있는 특수형이다. 이러한 고인돌 형식은 일정한 지역에 한정되어 있는데, 제주시 한천 변과 외도천 변이 그곳이다. 이러한 유형의 고인돌은 분명히 제주도의 다른 형식의 고인돌보다 많은 동력과 전문 인력이 동원되어서 축조된 것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러한 제주도식 고인돌의 피장자는 보다 우월한 지위에 있는 족장 층에 버금가는 신분일 가능성이 높다. 또한 이러한 형식의 고인돌의 분포를 통해 당시 가장 번창했던 마을, 아니면 중심 되는 마을을 추정할 수도 있다.
상석의 규모는 축조 시 동원 인력과 상관관계가 있기 때문에 축조 집단의 인구 규모를 가늠하고, 고인돌 피장자의 위세를 확인할 수 있는 등 당시 사회의 성격을 살피는 데 중요하다.
광령리 10호 고인돌의 경우, 그 무게가 약 15톤 가량 될 것으로 환산되었다. 이 고인돌 운반 과정에서 성인 남자 1인이 감당할 수 있는 무게를 100kg으로 잡는다면 이 단 1기의 고인돌을 운반하고 축조하기 위해서는 150명의 인력이 정도 동원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1가구당 4~5인으로 구성된 생물학적 가족 요건에 1인의 성인 남자가 있다고 가정한다면, 이 고인돌의 축조 당시 650~800명의 인구가 고인돌 인근에 거주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제주도 고인돌 분포 지역을 따져보면 약간씩 축조 시기를 달리하더라도 이런 고인돌을 축조 할 당시에 그 지역에는 약 200~300명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의의와 평가]
탐라 초기[탐라 형성기, 기원전 200~기원후 200]의 대표적인 묘제는 고인돌이다. 고인돌은 일정한 인구의 규모, 이에 따른 취락의 형성, 본격적인 농경과 협업체의 구성, 불평등 사회 구조 등의 배경 하에 축조되기 시작한다. 그 시작은 사회 구조를 갖춘 탐라 형성기의 삼양동 마을 유적으로 이곳에 자리한 지석묘는 지하 매장 주체를 둔 2톤 미만의 개석식 고인돌이 주류를 이룬다. 결국 고인돌의 분포와 동일 시기의 토기가 동반 되는 정도에 따라 살펴보면 탐라 초기에 한라산 북쪽에는 용담동·오라동 일대와 광령리·고내리·귀일리·곽지리·옹포리 일대에 각기 규모를 달리하는 거주 집단이 있었고, 한라산 남서쪽에는 일과리·동일리·화순리·창천리와 가파도 일대, 남동쪽으로는 신례리·신천리·신풍리·신산리 일대에 크고 작은 마을 집단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이하게도 우도를 제외하고 구좌읍 종달리~조천읍에 이르는 제주 동북부 지역은 고인돌이 아직 확인된 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