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6008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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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原州邊氏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강만익 |
[정의]
변안열(邊安烈)을 시조로 하고 변세청(邊世淸)을 입도조(入島祖)로 하는,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에 세거하는 성씨.
[연원]
원주변씨의 시조 변안열은 본래 심양(瀋陽) 사람인데, 중국 원나라 형부 상서로 있다가 고려 공민왕 때 노국공주(魯國公主)를 따라 들어와 원주[지금의 강원도 원주시]를 사향(賜鄕)으로 받고, 공민왕의 인척인 원주 원씨(原州元氏)의 딸과 혼인해 원주에 정착했다. 때문에 후손들이 변안열을 시조로 하고 원주를 본관으로 삼았다.
변안열은 1360년(공민왕 9) 남부 지방에 침입한 왜구를 이성계와 함께 격퇴시키는 데 공을 세워 원주부원군(原州府院君)으로 봉해졌다.
다음해 1361년(공민왕 10)에는 안우(安祐)를 따라 홍건적을 격퇴시켜 이등공신(二等功臣)으로 판소부감사(判小府監事)에 올랐고, 이듬해에는 개성(開城)을 수복하는데 앞장서 1등공신이 되었다. 또한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로 최영(崔瑩)과 더불어 제주의 목호를 정벌한 뒤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가 되었다가 후에 문하평리(門下評理)를 지냈다.
1389년(창왕 1) 이성계(李成桂) 일파를 제거하고 우왕(禑王)을 복위시키려는 김저(金佇)의 모의에 연루되어 1390년 처형당하였다.
원주변씨의 파는 별좌공파(別坐公派)·참의공파(參議公派)·첨추공파(僉樞公派)·남부령공파(南部令公派)·호군공파(護軍公派)·참판공파(參判公派)·감찰공파(監察公派)·군수공파(郡守公派)·부마공파(駙馬公派)·사용공파(司勇公派)·중랑장공파(中郞將公派)로 나뉜다.
[입향 경위]
제주 입도조 변세청(邊世淸)은 시조 변안열의 3세손으로 고려조에서 중령중랑장(中領中郞將)을, 조선조에는 중훈대부(中訓大夫)로 주학교수(州學敎授)를 역임했다. 1405년(태종 5) 정국이 혼란하자 신변에 위험을 느끼고 피신해 제주에 입도하였고, 현재 제주시 노형동에 정착해 도민교화에 힘썼다. 변안열의 3남 변예(邊預)는 판훈련원사를 역임하여 훈련공파라고 한다. 제주에 살고 있는 원주변씨는 원주부원군 변안열의 제3자 변예(邊預)의 후손인 훈련공파(訓鍊公派)들이며, 그의 막내 손자 중랑장공 변세청에 속한 후손들은 중랑장계에 속한다. 제주 입향 후 이 가문은 영조 시대에 이르러 7명[변시중·변성운·변성우·변성보·변경우·변경붕·변경준]이 문과에 급제하여 전성기를 이루었다.
[현황]
제주에 입도한 중랑장공 변세청의 후손으로 어모장군을 지낸 변사영의 두 아들 중 변응상계는 산북으로 이주하고, 변응창계는 서귀포시 효돈동을 중심으로 하례·신례·토평·서홍·법환 등지에 이주 정착했다.
2000년 11월 기준 757가구에 2,543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서귀포시 지역에는 효돈동, 대정읍 신도리 등지에 161가구에 512명이 살고 있다.
[관련 유적]
제주 입도조 변세청의 묘는 제주시 노형동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