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6008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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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仁同張氏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강만익 |
입향 시기/일시 | 1609년 - 인동장씨 입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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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인동 - 경상북도 칠곡군 인동 |
입향지 | 인동장씨 입향지 - 제주목 고내리 |
세거|집성지 | 인동장씨 집성지 - 서귀포시 도순동 |
성씨 시조 | 장금용(張金用) |
입향 시조 | 장보한(張輔漢) |
[정의]
장금용(張金用)을 시조로 하고 장보한(張輔漢) 등을 입도조(入島祖)로 하는,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에 세거하는 성씨.
[개설]
시조 태상경(太常卿) 장금용은 고려 때 삼중대광에 올라 신호위 상장군을 역임했고, 장금용의 아들 장선(張善)이 고려 문종 때 금오위 상장군을 지냈다.
[연원]
고려 문종조에서 금오위 상장군을 지내면서 기반을 굳힌 장선의 후손들이 본향지인 인동현(仁同縣)에 세거하면서 본관을 인동으로 삼게 되었다. 인동은 경상북도 칠곡군에 있다. 제주도에 세거하고 있는 인동장씨는 태상경(太常卿) 장백(張伯)의 8세손인 장보한의 후손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인동남산파(仁同南山派)·진가파(眞佳派)·종파·경파의 4파로 나누어진다.
[입향 경위]
인동장씨 중시조 장금용의 21세손 장윤태(張允泰)는 1605년(선조 38) 경주 부윤으로 재직할 때 당쟁에 휘말려 환관의 모함으로 제주에 유배되어 입도했다. 장보한은 장금용의 23세손으로 1609년(광해군 1)에 영창 대군이 억울한 죽임을 당하고 인목 대비를 둘러싼 폐모론이 일어나 정국이 혼란해지자 벼슬을 버리고 녹도에 유배 중인 형 장기한(張起漢)을 만난 후 제주에 입도했다. 판교사감서(判校事監書)를 역임한 중시조 23세손 장철(張澈)은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이 일어나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제주목 고내리에 피난 입도하였다. 중시조의 21세손인 장기일은 1637년(인조 15)에 장철과 마찬가지로 호란의 난리 속에 어려움을 피해 입도하여 명월마을에 정착했다.
[현황]
제주도에 세거하고 있는 인동장씨 중 진가파(眞佳派)는 중시조의 21세손 장윤태공이 1605년(선조 38)에 봉개마을에 정착했다. 삼양마을에도 많이 살아 일명 삼양파로 불리기도 한다. 인동남산파(仁同南山派)는 시조공의 21세손 장기일이 명월에 살다가 한림을 상대리 지경 천아오름에 묻혔는데, 그의 손자대에 이르러 장파·차파·말파로 나누어진다.
장파는 협재에 많이 살며 세영공계로 칭한다. 차파는 이남공계라 하여 애월읍 어음리에 많이 살고 있으며, 말파는 애월읍 곽지리에 많이 살며 남의공계라 칭하기도 한다. 종파는 중시조의 23세손 장철공의 후손들로 애월읍 내리·하가리·하귀리, 그리고 서귀포시 남원읍 일대에 살고 있다. 경파는 장보한공의 후손으로 제주의 서부 지방에 많이 살고 있는데, 애월의 장한철이 문과에 급제한 이후 '애월장칩'으로 불리기도 한다.
2000년 11월 현재 인동장씨는 제주도 전체에 1,919가구 6,160명이 살고 있으며, 서귀포시 지역에는 도순동 등지에 338가구에 1,013명이 거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