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윤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823
한자 李基允
영어공식명칭 I Giyun
이칭/별칭 집중(執中),극암(克菴)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시대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권영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1년 4월 8일연표보기 - 이기윤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 이기윤 파리 장서 운동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19년 4월 30일 - 이기윤 대구지검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불기소 처분 받음
몰년 시기/일시 1971년 9월 11일연표보기 - 이기윤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6년연표보기 - 이기윤 대통령 표창 추서
출생지 이기윤 출생지 -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한개2길 31[대산리 412]지도보기
거주|이주지 이기윤 거주지 -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한개2길 31[대산리 412]
거주|이주지 이기윤 이주지 - 전라남도 강진군 칠량면 송산리
활동지 이기윤 활동지 - 경상북도 성주군
활동지 이기윤 활동지 - 전라남도 강진군
묘소 이기윤 묘소 - 경상북도 성주군 선남면 성원리 700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 강점기 성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집중(執中), 호는 극암(克菴). 조선 후기 문신 월봉(月峯) 이정현(李廷賢)[1587~1612]의 10세손이며, 아버지는 이익희(李益熙)이다.

[활동 사항]

이기윤(李基允)[1891~1971]은 1891년 4월 8일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한개2길 31[대산리 412]에서 태어났다. 성장하면서 회당(晦堂) 장석영(張錫英)의 문하에서 공부했고, 성품이 온유하고 재주가 뛰어나 석학(碩學)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서도(書道)에도 조예가 깊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되자 “왜도(倭盜)가 우리 땅에 올라와 도리어 보호를 한다 하니 이런 조약이 어디 있느냐”하고, 격분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을사오적(乙巳五賊)을 성토하고 공론을 일으키는 데 힘썼다.

1919년 3월 파리 강화 회의에 즈음하여 김창숙(金昌淑) 등의 유림단(儒林團)이 추진한 파리 장서 운동[독립 청원 운동]에 참여하였다. 파리 장서 운동의 핵심 인물인 장석영이 프랑스에서 열리는 파리 강화 회의에 보낼 파리 장서를 기초할 때, 문인으로서 초안 작성과 필역(筆役)에 참여하였다. 장서에 서명할 동지들을 규합하면서 자신도 한국 유림 대표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고자 했으나 “칠십 노모 시하(侍下)이니 노모 봉양에 힘쓰라.”는 스승 장석영의 만류로 뜻을 펴지는 못하였다.

1919년 4월 2일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장날의 만세 운동 이후, 일제 경찰이 만세 시위 주동자들을 붙잡아 조사하였다. 조사 과정에서 파리 장서 운동의 기밀이 발각되어 파리 장서에 서명한 유생들이 대대적으로 검거되었고, 서명자는 아니었지만, 이기윤도 직접적인 연루자로 지목되어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1919년 4월 30일 대구지검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심문을 받았으나 불기소 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이후로 세속과 단절하며 학문에 전념했고, 1943년부터 1950년 3월까지 7년 동안은 전라남도 강진군 칠량면 송산리에 거주하면서 여러 사우(祠宇)에 편액을 남겼다. 서체는 무게감 있고 웅장하면서 부드러움이 느껴져 편액 글씨의 진수(珍秀)로 평가되고 있다. 이후 향리로 돌아와 1971년에 사망하였다. 향년 81세였다.

[저술 및 작품]

『극암문집』 17권이 있다.

[묘소]

묘소는 경상북도 성주군 선남면 마현리에 있었으나, 2019년 5월 선남면 성원리 700의 문중 묘원으로 옮겨졌다.

[상훈과 추모]

1996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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