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3008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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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全聖範 |
이칭/별칭 | 전주대(全珠大)/설송(雪松) |
분야 | 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거창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이가연 |
[정의]
개항기 거창 지역과 덕유산을 중심으로 활동한 의병장.
[개설]
전성범(全聖範)[1870~1911]은 1907년 거창 지역을 중심으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고, 1906년에는 덕유산의 문태수 의병장과 합세하였다. 1908년에는 의병장 유종환(兪宗煥)과 합세하여 거창, 장수, 무주, 안의, 금산, 영동 지구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가계]
전성범의 본관은 정선(旌善)이다. 본명은 주대(珠大)이고 호는 설송(雪松)이다. 아버지 전재연(全在淵)과 어머니 밀양 박씨(密陽朴氏)의 넷째 아들이다.
[활동 사항]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하였으나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사대부의 길을 포기하고 독립운동의 길에 나섰다. 1906년 최익현(崔益鉉)이 의병을 모집할 때에 전성범도 합세하였다. 그러나 최익현과 그 지휘관들이 체포되자 의병진은 사방으로 흩어졌고, 전성범은 다시 의병을 모집하여 호남 일대에서 독자적으로 투쟁을 계속하였다. 1906년 9월 17일(음)에 문태수 의병장이 전북 장수의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하여 많은 사상자를 내고 무기를 탈취하는 데 성공하자, 전성범은 박수문(朴守文) 의병장 등과 함께 문태수 의병진에 합류했다. 문태수는 이 의병진을 ‘호남 의병단’이라 명명하였다.
1907년 1월에는 무주 부남면 고창곡으로 일본군을 유도, 습격하여 40여 명을 사살하고 총기 50여 자루를 빼앗았다. 10월 7일에는 의병 300여 명을 인솔하여 안의 심진동에서 일본군 30여 명을 섬멸하였고, 다음날은 거창 월성에서 일본군과 혈전을 벌였다. 1908년 4월 10일 전성범은 신명선(申明善), 이병열(李秉烈) 부대와 연합하여 15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장수읍을 습격하여 주재소와 군청 등을 불태웠다. 1909년 4월부터는 거창군 북상면 월성, 산수, 병곡, 당산 마을을 근거지로 삼아 활동하였다. 그러나 1909년에 접어들면서 일제의 맹렬한 토벌 작전으로 의병의 세력은 점차 약해졌고 우월한 무기를 가진 일본 정규군과의 전투에서 많은 피해를 입었다. 이에 의병들은 와해되거나 소규모 부대로 편성되어 유격 전술로 일본군과 대적하였다.
1910년 이른바 ‘한일 합병 조약’으로 국권을 빼앗기자 전성범은 1911년 1월 다시 의병을 규합하여 장수 양악(陽岳)의 토옥동(土沃洞)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사로잡혀 대구 감옥에 투옥되었다. 그러나 곧 벽을 뚫고 탈출하여 합천의 친척집에서 피신하던 중 다시 체포되었고 1911년 4월 5일 (음력1911년 3월 7일) 옥사하였다.
[묘소]
국립 대전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전성범의 묘소가 있다.
[상훈과 추모]
1990년 전성범에게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