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5004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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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竹島考 |
영어음역 | Jukdogo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문화·교육/언론·출판 |
유형 | 문헌/단행본 |
지역 | 경상북도 울릉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승진 |
성격 | 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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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인물 | 안용복(安龍福)|박어둔(朴於屯) |
간행자 | 오카지마 마사요시[岡嶋正義] |
저술연도/일시 | 18세기 |
소장처 | 돗토리현 현립박물관 |
[정의]
1828년 일본 역사가 오카지마 마사요시가 저술한 안용복의 이야기가 실린 일본 문헌.
[개설]
『죽도고』의 「오오야가(家) 선인(船人)에 의한 조선인 연행」이란 항목에는 안용복과 그의 일행이 일본인에게 잡혀 일본으로 가서 있었던 일들이 기록되어 있다.
[구성/내용]
안용복은 부산 좌자천일리(佐自川一里) 14통 3호[현 부산시 동구 좌천동]에 주소를 둔 외거노비(外居奴婢)였고 일본 선원들에게 나이를 42세라고 했지만 호패를 발급한 1690년(숙종 16) 당시가 33세였으므로 1693년 당시에는 36세가 된다. 얼굴은 검은데 검버섯이 돋았고 흉터는 없으며 키는 4척 1촌[1m 23㎝]으로 기록되어 있다. 키가 현행 척제(尺制)로 따지면 지나치게 작은데 아마도 옮겨 적는 과정에서의 잘못으로 보인다.
박어둔(朴於屯)은 소금을 굽는 염간(塩干)으로 1693년 당시 33세였으며 주소는 울산(蔚山) 청양(靑良) 목도리(目島里) 십이통(十二統) 오가(五家)였다. 안용복의 신분은 천민이었고 박어둔은 양인이었다. 안용복이 살던 부산시 동구 좌천동에는 임진왜란 이후 유일하게 일본 무역이 허용되었던 ‘두무포왜관’이 있었다. 여기에서 안용복이 일본말을 배워 일본 관리들과 담판을 할 수 있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1614년(광해군 6) 6월 대마도주는 부산 동래부에 서계(書啓)를 보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분부로 죽도[울릉도]를 탐견(探見)하려고 하는데 큰 바람을 만날까 두려우니 길 안내를 내어달라”라고 하였다. 조선 정부에서는 이를 거절하는 문서를 보냈다.
그 해 9월 비변사 건의에 따라 울릉도가 조선에 속한 사실이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실려 있고 도민(島民)을 소환한 기록도 명백하게 있으므로, 앞으로 일본 측의 이 같은 시도가 있으면 대마도주에게 강경한 내용의 서계를 보내 막부에 보고하도록 하고 울릉도에 일본인 왕래를 금지하도록 경상감사와 동래부사에게 지시하였다.
그러나 1617년 일본의 오오야, 무라카와 두 가문은 ‘죽도[울릉도] 도해 면허’를 받은 지 약 40년 후인 1661년에 ‘송도[독도] 도해 면허’를 막부로부터 얻게 된다. 그 후 일본 어부들은 울릉도 근해에서 고기잡이를 독점해 왔고, 조선인들의 출어가 있자 오오야 가문을 비롯한 일본 어부들은 그 어장(漁場)에 대한 침범으로 보고 1692년(숙종 18)부터 조선 어민의 납치를 모의하여 오다가 실현에 옮겼던 것이다.
안용복과 그 일행은 오오야 가문의 어선에 실려 3월 18일 울릉도를 출발하여 20일 돗토리현[鳥取縣]의 부속 섬인 오키시마[隱岐島]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안용복은 섬의 책임자인 다이칸[代官: 도주]에게 인도되었고, 여기서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들어 자신에 대한 납치 구금의 부당성을 주장하였다.
[의의와 평가]
이 책에는 우리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는 안용복 사건에 대한 기록도 많고 독도가 조선의 땅임을 밝히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어 현재 일본과의 독도 영유권 분쟁의 중요한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