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울릉문화대전 > 울릉의 마을 이야기 > 천부마을 > 개척민들의 삶과 터전 > 개척민들의 삶과 그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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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울릉도를 조사한 도리이 류우조는 ‘조선인이 사는 곳은 주로 골짜기의 상류, 혹은 산의 매우 높은 곳이며, 나무를 불태워 없애고 화전농사를 짓고 있다. 어업이라는 일은 최근에 하기 시작하였으며, 주민의 생업은 주로 농업이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반해 ‘일본인의 경우 농업을 하는 일본인은 적으며 그들은 해안에 집이 있으며, 오징어잡이를 하고 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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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부에 정착한 개척민들은 처음에 본천부, 혹은 나리동 등의 산중에 터를 잡았고, 점차 해안가로 내려온 것으로 개척민들의 후손들은 증언하고 있다. “나리동에 개척 당시에 180세대 정도 살았어요. 바닷가에 사는 것들은 아랫것들 하며…….(웃음) 그때 뭐 동학난이가 뭐 그라고 어떤 사람들은 여 뭐 자기가 띠지면(경작하면) 다 자기 땅이다 해가 온 사람도 있고. 우리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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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놈들이 와가지고 향나무, 괴목나무 등을 네모로 따버리고 가져가던 그때인데, 산에 가면 나무를 쌓아놓고 위에 비뿌고 필요한 부분만 따가 가가 버렸거든요. 왜놈들이 전부 해갔어요. 우리 여, 백십 년 더 되었나. 그때 본천부 쪽에 배를 대가 왜놈들이 나무하러 왔는 모양이라. 그들이 더웠는 모양이지. 웃통을 벗었나 보지. 그런 넘이 뭐 주는데, 꼭 떡 같은데 집에 가와가 먹어보니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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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가 해방되던 해가 내 나이가 8~9세였나 그랬죠. 일본 사람 봤죠. 석포에 놀기 삼아 가보시면 알겠지만, 부대가 들어와 있는데. 거기에 일본 부대가 들어와 있었죠. 그래서 봤죠. 그리고 일반인들이 사는 것은 못 봤어. 읍 쪽에는 살았다고 합디다. 제가 나이가 어중간해서 저보다 나 더 묵은 사람이 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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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서는 왜놈들하고 한이 맺힌 사람이 별로 없었어요. 못 가게 하고 복수한다던지 하는 거는 없었습니다. 근데 저건 모르겠어요. 무기, 그건 방공호에 다 묻었을 거예요. 그리고 그들은 다 잘살았어요. 일본인은 일등국민이고, 우리는 이등국민이고, 만주는 3등국민이고……. 왜놈들이 여 와가 약탈하고 하지는 않았어요. 그래가 깨끗하게 다 보내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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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놈들이 와가 여 어업이 개척되었어. 오징어·상어·고등어·한치를 잡았지. 그때만 하더라도 배 하나만 하더라도 괜찮았어. 고등어는 주낙으로 많이 잡고. 정어리를 잡아가 염장을 해두었다가, 고등어 미끼로 쓰고 그랬죠. 그래 차츰차츰 가다 누에 먹이고. 울릉도 누에 많이 쳤습니다. 그 다음에 산채. 누에는 춘잠 추잠 일 년에 두 번 하는데, 누에 없어진 지가……. 박통시대 많이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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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어릴 때는 여기서 생활필수품 같은 것은 오징어배 타고 도동 가가 구입했어요. 나무도 도동에서 땔 거 없으면 우리가 장작을 해가 싣고 가고, 전부 배로 가져가고 가져오고 했어요. 당시에 전부 나무 땠어요. 나무를 많이 베서 나무를 그땐 땔감으로 사용하고 나선으로 많이 가져가고, 일본 사람도 많이 가져가고……. 가을철 되면 겨울나무 한다고 산에 가가 좋은 나무들 베기 좋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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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엔 약 40호 정도 살았는데, 지금은 이곳에 다섯 집, 저 위에 일곱 집, 한 집에 한두 명, 겨우 이십 명 정도밖에 안 됩니다. 예전의 한 가정밖에 안 될 정도이죠. 예전엔 마을이 아담하고 좋았는데, 60년 중반에서 70년대 사람이 많이 살았고요. 지금 내가 나이가 제일 적은데 대부분 70 이상이죠. 한번 나가면 안 들어오니 마을에 빈 집이 생기고 외지인의 소유토지가 증가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