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울릉문화대전 > 울릉의 마을 이야기 > 태하마을 > 태하를 지키고 있는 이런사람, 저런사람 > 군제대후 가정형편으로 눌러앉은 안영학의 삶
-
“우리가 할아버지가 총각 때 오셨어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가 한 20년 되었습니다. 90살에 돌아가셨으니깐 110년 전, 총각 때니깐 100여 년, 경주 모량면에서 들어왔어요. 그 윗대는 울진군 평해, 거기 있다가……. 그 전에 우리 할아버지가 남자 형제가 4형제였어. 우리 할아버지가 막내였어. 아버지가 1921년 울릉도 생이니깐. 1910년에 한일합방하고. 큰할아버지가 울릉도...
-
“우리 아버지가 선대 여 앞에 양조장 및 어업을 했어요. 하다가 막걸리도 잘 안되고 해서 치우고, 어업을 했어요. 유지인데, 아버지가 성격이 와일드해가 내가 군대 있을 때, 오징어잡이 2년 해가 돈을 다 띠어 버렸다니깐. 10원도 못 받고, 그래가 가정형편이 어려워 졌어요. 1년 사업해가 모아뒀다가 써야 되는데 그것을 한 푼도 못 받았으니, 그게 엄청났어요. 집이 어려워져서 어쩔...
-
“옛날 동력선 하나 가지고 있으면 그 당시 부자였어요. 그때는 오징어, 고기가 엄청나게 많고. 우리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다닐 때만 해도. 여 바다에 가가 전복 많이 먹어요. 요새 아들은 전복 같은 거 구경 못 하잖아요. 내가 제대해가 와서도 바닷가에 소주만 가가면, 전복 소라는 못 먹을 정도로 따와가 먹어요. 요즘은 잠수부도 들어가도 귀하다고 그러잖아요. 그때 동력선 하나...
-
“울릉도는 그 당시 항구시설이 안 돼 있었어요. 그래가 배를 전부 뭍으로 올렸어요. 저동항도 그 당시 안돼 있었어요. 처음에 올릴 때는 ‘마깨’라고 통나무에 와이어를 걸고 거기에 구멍을 2개 뚫어가 나무대를 대가, 사람들이 10여명이 돌린다고. 그게 조금 발달되어가, 동기라고, 배 기관실 옆에 도는 축을 만들어가, 뭍에는 중심축을 놓고 배에서 감으면 올라간다고. 그렇게 조금 발달되...
-
“예전엔 전부 다 산에 가가 지게지고 나무했어요. 그러다 연탄 나오니 하러가라 해도 안 하잖아요. 그래가 숲이 무성해졌죠. 그때는 전부다 나무 했어요. 정책이라는 게 참 좋아요. 군 산림계에서 와가 단속하고 톱 뺏고, 그래도 따뜻하게 날려면(지낼려면) 다음날 또 나무하러 가요. 그때는 울릉도 나무를 다 조졌어요. 그러다 연탄 때니 하라 해도 안 해요. 요즘은 산에 가면 나무가 천지...
-
“저 위에 서달 골짜기 안으로 가면, 와사비골이라고 하는데. 일본 사람이 고추냉이를 여서 재배를 했어요.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많았어요. 논 같이 이래가 온도가 18도 이하로 해야 산다고 하더라고. 손바닥만한 돌을 밑에 놓아두면 자연적으로 커져요.”...
-
“아래채는 안영학씨가 운영중인 민박 지정집으로, 집이 깨끗해요. 일본식으로 지었어요. 벽도 흙이라요. 전부 대를 넣어가 흙으로 집을 지었어요. 한 50년 가까이 되었어요. 내가 중학교 1~2학년 때 지었으니, 49년쯤. 울릉도에서 최고 좋게 지었죠. 민박은 한 2만원씩 받아요. 방이 세 개. 손님들 뭐 이까지 옵니까? 요즘은 소개받아가 가끔씩 오기는 하지. 오는 사람들은 좋아하더라...
-
“옛날 제대하고 왔을 때는 친구들 참 많았어요. 그러다 울산, 현대 조선소 생기다보니 다 나가고 없어요. 예전에는 여 초등학교에 한 학년에 60~70명 되었는데, 요즘은 올해 입학생도 없다고 하더라고. 도동에서 분교인데. 심산소학교라고, 도동 일년 후에 생겼어요. 천부나 남양에는 초등학교가 하나도 없었는데, 도동 일 년 후에 생긴 거로 역사가 참 깊어요. 100년 넘었어요. 일제강...
-
“67, 8년도 배 만들 당시 그때는 목선이었어요. 지금은 FRP인데, 3척을 지어가 2척은 팔고. 지금은 배 한대 가지고 있어요. 오징어잡이 하는 데도 어가도 비싸고 비용도 많이 들고 그러죠. 기름값도 계속 올라가고……. 전에 우리 배 같은 경우는 18~20명씩 타고 했는데. 내가 먼저 시도를 해가 일본서 하마데회사, 자동조산기그거로 해가, 그게 울릉도 다 퍼져가, 지금은 한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