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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500548
한자 閔種黙
영어음역 Min Jongmuk
이칭/별칭 현경(玄卿),한산(翰山)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울릉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병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성별
생년 1835년연표보기
몰년 1916년연표보기
본관 여흥(驪興)
대표관직 외부대신

[정의]

조선 말기 독판교섭통상사무를 역임한 문신.

[가계]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현경(玄卿), 호는 한산(翰山). 민승세(閔承世)의 아들로 민명세(閔命世)에게 입양되었다.

[활동사항]

1874년(고종 1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며, 이듬해 사은정사(謝恩正使) 한돈원(韓敦源)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임명되었다. 1876년(고종 13) 사신으로 청나라에 다녀오고 나서 홍문관부수찬·사간원지평·사복시정(司僕寺正)·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881년(고종 18)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 외무성을 시찰한 다음,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이 설립되자 통상사당상(通商司堂上)에 임명되었다. 1882년(고종 19) 성균관대사성·한성부우윤·병조참판을 거쳐, 임오군란 이후 진하사은겸세폐부사(進賀謝恩兼歲幣副使)로 임명되어 청나라의 세관 업무를 시찰하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 1883년(고종 20)에 이조참판·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한성부판윤·형조판서·농상사구관(農商司勾官) 등을 지냈다. 1886년(고종 23) 예조판서와 홍문관제학, 1887년(고종 24) 공조판서와 사헌부대사헌, 1888년(고종 25) 형조판서와 홍문관제학 및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1889년(고종 26)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가 되었다. 그 뒤 3년간 방곡령사건, 조일통어장정(朝日通漁章程) 체결, 제주어채(濟州魚採) 문제 등 주로 외교와 통상 문제를 해결하였다.

또한, 1889년(고종 26) 일본 어선단의 선박 24척이 울릉도에 입도하여 곡물을 자르고 관가와 민가를 부수는 등 크게 소동을 일으킴에 따라, 당시 독판교섭통상사무를 맡은 민종묵은 일본공사관에 일본어민들의 울릉도 불법 행위에 대해서 항의하였고, 처벌과 배상을 요구하였다. 이에 일본 대리공사 곤도 신조[近藤眞鋤]는 민종묵에게 사죄하고 일본 어민들의 울릉도에서 불법 행위를 부산·원산 영사에게 조사 처리하도록 지시하였다.

1892년(고종 29) 함경북도안무사(咸鏡北道按撫使), 1894년(고종 31) 지중추부사, 1896년(고종 33) 장례원경(掌禮院卿)을 거쳐 1897년(고종 34) 외부대신·홍문관학사·탁지부대신, 1898년(고종 35) 중추원일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홍릉제조(洪陵提調)로 임명되었다. 또한, 1898년 외부대신이 되어 한아회사(韓俄會社)를 설립하여 절영도(絶影島)를 러시아 태평양함대의 저탄소로 조차해 주려고 획책하다가 독립협회의 탄핵을 받았다.

1898년(고종 35) 11월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시정의 개혁을 요구하던 독립협회를 무력으로 해체하기 위해 미국·영국 공사에게 통고하였으나 회원들이 강력하게 반대해 실행하지 못하였다. 그 뒤 1899년(고종 36) 궁내부특진관·경효전제조(景孝殿提調)·의정부찬정(議政府贊政)·내부서리대신·농상공부서리대신 등을 거쳐, 1910년까지 법부서리대신·천릉도감제조(遷陵都監提調)·농부대신·양지아문총재(量地衙門總裁)·예식원장(禮式院長)·규장각제학(奎章閣提學) 등을 지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본으로부터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저술 및 작품]

편찬서로는 『일본문견록(日本聞見錄)』, 『일본각국조약(日本各國條約)』, 『일본외무성시찰기(日本外務省視察記)』 등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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