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5D020100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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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태하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호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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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원 검찰사 울릉도 검찰일기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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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4월) 27일 평해읍(平海邑)에서 10리쯤 떨어진 구산포(邱山浦)에서 바람을 기다리다가 29일에 순풍(順風)을 만나 중추원도사(中樞院都事) 심의완(沈宜琬)과 군관출신(軍官出身) 서상학(徐相鶴), 전수문장(前守門將) 고종팔(高宗八), 차비대령화원(差備待令畵員) 유연호(劉淵祜)와 사공, 격군 등 82명, 포수(砲手) 20명을 3선(船)에 나누어 싣고 당일 오전 8시쯤에 배를 출발시켜 바다 가운데로 나갔는데, 바람은 불리하고 파도가 험하여 사방에 한 점의 산도 없는 대해(大海) 가운데서 키질하듯 배가 요동하여 향할 바를 모르다가 다행히 해질 무렵에 다시 남서풍을 만나 밤새도록 배를 몰아서 30일 오후 6시쯤에 섬 서쪽 가에 이르러 정박하였습니다.
지명(地名)은 소황토구미(小黃土邱尾)로, 포(浦) 가에 천막을 치고 머무는 사람들이 있어서 상세히 탐문(探問)해 보니, 전라도(全羅道) 흥양(興陽) 삼도(三島)에 사는 김재근(金載謹)이 격졸(格卒) 23명을 데리고 배를 만들며 미역을 딴다고 상륙하여서 초막(草幕)에서 묵었습니다.
5월 초1일 바람과 물결이 크게 일어나 배를 묶어 놓은 밧줄이 끊어질 듯하여 선인(船人)들이 급히 상선(商船)이 갖고 있던 밧줄을 구하여서 네 곳을 묶어 다행히 위급함을 면하고 산신당(山神堂)에 기도하였습니다.
초2일 드디어 산행(山行)에 올랐습니다. 고개를 넘어 대황토구미(大黃土邱尾)에 이르렀는데 길가에는 넓은 돌을 덮개로 하고 사방을 작은 돌로 받쳐 놓은 것이 많았는데, 옛날 사람들의 석장(石葬)이라고 합니다. 개울물을 따라 포구에 이르니, 평해선상(平海船商) 최성서(崔聖瑞)가 격졸(格卒) 13명과 함께 천막을 치고 머물고 있었으며, 경주인(慶州人) 7명이 천막을 치고 약초를 캐고 있었고, 연일인(延日人) 2명이 역시 천막을 치고 대나무를 베고 있었습니다. 이 날 걸은 산길이 거의 30리에 가깝고 봉우리가 높아서 하늘을 찌르는 듯하였으며, 나무가 해를 가리고 숲길은 실같이 나 있었습니다. 해가 져 가는데 독기 있는 바다 기운이 옷을 적셔서 초막(草幕)에서 묵었습니다. 초3일 산신당(山神堂)에 제사지내고 고개를 넘어 숲을 뚫고서……(하략)
고종이 “울릉도는 본래 삼척영장 월송만호가 돌려가며 수토(搜討)하는 것인데, 그 거행에 모두 소홀함을 면치 못하고 단지 외면을 검찰해 왔다.”고 한 것에서 보다시피, 이규원 검찰사가 울릉도를 검찰하러 왔을 때 우리나라 사람 141명, 일본인 78명 등이 살고 있었다. 조선시대에 태하를 비롯한 울릉도에는 아무도 살지 못하도록 하는 수토정책을 시행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